이직이 어려운 이유를 실력에서 찾지 않기로 했다

한 우물을 판 30–40대 디자이너의 커리어 체형에 대하여


경력직의 이직이 멈추는 시기


요즘 유독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이직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


특히 30대 중후반, 40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이직이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적인 고민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실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도 아니고, 일을 대충 해온 것도 아닌데 서류에서 미끄러지고, 면접에서는 자꾸 어긋난다. 누군가는 물경력이나 경력 단절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과한 경력이나 한쪽으로 치우친 이력을 이유로 설명 없는 탈락을 반복한다.


결국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이제 내가 일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난 걸까.”라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 질문은 디자인 업계의 빠른 변화로 인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직에 대한 고민을 할 때에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직이 막히는 이유는 실력이 아니라, 지금 내 커리어가 이 시장의 JD와 더 이상 맞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JD는 옷이고, 커리어는 체형이다


이직을 옷에 비유하면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채용공고로 올라오는 Job Description(이하 JD)은 옷이고, 디자이너의 경력은 몸의 체형이다. 20대 초반에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몸이 계속 변화하는 시기다. 살도 붙었다 빠졌다 하고, 운동하는 부위에 따라 근육도 여기저기 생긴다. 그래서 웬만한 옷은 대충 맞는다. 조금 크면 수선해서 입고, 조금 작으면 참고 입는다. 핏이 완벽하지 않아도 “경험치”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30–40대가 되면 체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특정 부위만 근육이 발달하고, 관절 가동범위도 줄어든다. 몸은 더 강해졌는데 유연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이 시기의 이직이 어려운 이유는 입고 싶은 옷이 작아서가 아니라, 재단이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브랜드에 따라 어깨 각도가 다르고, 허리선이 다르고, 팔 길이가 다르고, 흔히 말하는 TPO에 따른 쓰임새 자체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생기는 현상은 면접에서 흔히 듣게 되는 결과이다. 실력은 충분한데 “우리 팀이 찾는 핏은 아닌 것 같아요.” 경험은 많은데 “우리가 기대하는 역할이랑 결이 좀 다르네요.”


이직에 급한 마음이 들게 되면 누군가는 이 현상을 “스스로가 부족해서”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지금 내 체형에 맞는 옷을 안 고르고 있다”에 가깝다. 내가 보고 있는 JD가 내가 그동안 키워온 커리어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성실히 한 우물을 판 커리어, 왜 이직에서는 불리해질까


어느 순간부터 유행했던 말이 있다. 바로 "T자형 인재”라는 말이다. 하나의 분야는 확실하게 전문성으로 가지고 있고, 다른 영역으로도 넓게 연결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프레임을 현재 발생하는 디자이너의 이직 문제에 대입해 보면 꽤 많은 게 설명된다. 30–40대 디자이너들 중에는 I자형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 대학 교육의 커리큘럼이나 전공 전환, 첫 회사의 도메인 등 여러 이유로 인해 하나의 우물을 깊이 파게 된 것이다.


주로 하나의 도메인이나 비즈니스 영역만 담당했거나, 하나의 제품, 동일한 디자인 툴, 비슷한 조직문화, 그리고 같은 역할의 포지션만 감당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연차가 쌓이게 되고 7년에서 10년 가까이를 한 회사에서만 머물게 된다. 예전에는 한 회사를 오래 다니는 것이 성실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디자인 업계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는 이게 그 당시 재직하던 회사 안에서는 엄청난 강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 회사의 맥락에서는 이 사람보다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속도도 빠르고, 실수도 적고, 판단도 정확하다. 그런데 이 상태로 이직 시장에 나가게 되면 갑자기 상황이 바뀐다.


다른 회사 입장에서는 이렇게 보이기 쉽다.

“이분, 우리랑 너무 안 맞을 것 같아요.”
“적응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우리 팀 역할이랑 재단이 다르네요.”


부분적으로는 기대하는 실력에 못 미쳐서일 수 있지만, 30-40대 정도 되는 시점에서는 결코 기본적인 실력이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너무 특화돼 있어서 다른 JD로 옮기기 어려운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한 우물을 판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우물이 너무 깊어져서 다른 우물로 물을 못 퍼 나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결국 T자형 인재의 핵심은, 사실 스킬의 개수가 아니라 역량의 전이력이다.


보유한 경험을 다른 맥락에서도 쓸 수 있는지, 이 역할을 다른 조직 구조에서도 재현할 수 있는지, 경험한 문제 해결 방식을 다른 도메인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대다수의 시니어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고민을 별로 해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 이유는 소속된 조직 내에서 충분히 잘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다른 걸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고 회사도 그걸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직이 막힐 때 우리는 주로 이렇게 오해하기 쉽다.

“내가 너무 오래 한 회사에 있었나 보다.” “내가 너무 한 분야만 오래 했나 보다.”


하지만 더 정확한 진단을 내려보면, I자형으로 굳어버린 커리어 체형을 T자형을 요구하는 JD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30–40대 디자이너 이직을 막는 4가지 불일치


이직이 막히는 디자이너들을 보면 대부분 이 네 가지 중 하나 이상의 문제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다.


1) 하드 스킬 핏 불일치

깊지만 너무 특수한 스킬이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특정 일을 매우 잘하지만, 어디서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시스템을 오래 운영했거나, SaaS나 교육 등 특정 서비스 유형만 오래 했다면 다른 회사 JD에서는 경험은 좋은데 다른 환경에서 사용가능할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너무 특수해서 바로 못 쓰는 상태에 해당한다.


2) 소프트 스킬 핏 불일치

“이 연차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요?”

30–40대 디자이너에게 JD가 기대하는 건 ‘잘 그리고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 정의부터 의견 조율, 보고 및 설득, 의사결정까지도 연결되기도 한다. 필요시 리더 역할로 매니지먼트까지 기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그동안 이 역할을 해본 적이 없고,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준비하지 못했다면 면접에서 자주 말문이 막히게 된다.


3) 정체성 서사 불일치

지금까지 해온 일과 현재 시장이 원하는 ‘시니어 디자이너 서사’가 달라지고 있다. 프로젝트는 많은데 한 줄로 설명되는 커리어가 없다면, 아무리 본인을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디자이너"라고 소개할지언정, 말과 이력이 어긋난다. 그럴 경우 면접관은 커리어 상의 불일치를 바로 느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4) T자형 불일치

앞서 말한 것처럼 깊이는 있는데, 전이력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경력자를 채용하는 JD가 기대하는 건 “이 사람이 우리 맥락에서도 이 일을 재현할 수 있는가”다. 하지만 포트폴리오는 이전 회사에서만 통하는 사례로 가득하다면 평가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실력은 좋아 보이는데 우리랑 맞을지는 모르겠어요.”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가는 여정


30–40대 디자이너의 이직이 어려운 건 개인의 태도나 노력만으로 설명되기엔 현재 시장이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 구체적이고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이 연차에서 중요한 건 실력을 더 쌓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커리어가 어떤 JD에 실제로 쓰일 수 있는지 냉정하게 재분류하는 일에 가깝다. 한 우물을 판 경력은 여전히 자산이지만, 모든 시장에서 통용되는 자산은 아니다.


시니어 디자이너 이후의 이직은 “그동안 얼마나 잘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어떤 역할로 들어갈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뀐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계속 같은 옷을 들고 다른 가게를 전전하게 된다.


경력직 이직이 막힐 때 필요한 건 결국 자기부정이 아니라, 시장과 내 커리어를 동시에 다시 읽는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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