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옷을 고르지 않기로 하자, 생각이 돌아왔다

아이를 키우면서 사라진 건 시간이 아니라 여백이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플래너가 가득 차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원 시절,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시간만 조금 더 있으면 좋겠어.”


그런데 막상 아이를 키워보니, 정작 내가 잃어버린 건 시간이 아니라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었다.


하루는 24시간으로 그대로인데, 머릿속은 늘 여러 개의 탭이 동시에 열려 있다. 오늘 아이 컨디션, 회사 일정, 저녁 메뉴, 내일 입힐 옷 등등 끝없는 생각들이 쏟아진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들은 사실상 바쁘다기보다는, 내가 계속 판단해야 하는 상태에 가깝다.



하루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결정을 할까


아이를 깨우고, 출근 준비를 하고, 등원 준비를 병행한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알람 시간을 나누고, 샤워 순번을 정하고, 작은 합의들을 매일 반복한다.


이어지는 의사결정 리스트는 다음과 비슷할 것이다.

오늘 날씨에 맞는 옷은 긴팔일까 반팔일까?

이 옷은 어린이집에 입혀도 될까? 외투는 무엇을 입힐까?

어제 잠을 잘 못 잤는데 컨디션은 괜찮을까?

오늘 회의에서 이 안건은 내가 먼저 말해야 할까?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이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하루 종일 쌓이면 생각의 체력은 금방 바닥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가장 좋은 옵션을 ‘잘 선택하는 것’보다 아예 선택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예시 1. 아이 옷 고민을 없앴다

매일 아침, 서랍에 가득한 아이 옷 앞에서 멈춰 서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거 이번 주에 한번 입었나?”
“이건 활동하기 불편하지 않을까?”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5분, 10분이 지나가 버리곤 한다. 그래서 기준을 아주 단순하게 정했다.


월·수·금: 깔끔한 상하복 / 물감이 묻어도 되는 색깔 상의

화·목: 음악 수업 / 체육 수업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기 편안한 활동복(셋업)

날씨 변수는 ‘외투’로만 조절 (가디건 - 점퍼 - 패딩 등)


사실 아이의 아웃핏이 내가 보기에 가장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아침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옷을 잘 입히는 부모가 되는 대신, 아침에 한 칸의 생각을 아껴두는 부모가 되기로 했다.




예시 2. “오늘 뭐 먹지?”를 질문 목록에서 삭제했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동일한 질문을 배우자에게 던진다.
“오늘 뭐 먹지?”


이 질문은 늘 피곤할 때 나타나서 의외로 큰 에너지를 가져가곤 한다. 그래서 주중에는 메뉴를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월~목: 이미 정해진 루틴 메뉴 / 재료로 요리해서 먹기

금요일: 배달 or 외식

주말: 그때 가서 생각하거나 약속이 있다면 외식


요리를 잘하려는 목표보다, 평일 저녁의 판단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하나둘씩 정리하다 보니 맞벌이 부모가 하루에 내려야 할 결정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회사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판단을 하고 있기에, 집에서까지 모든 걸 완벽한 결정으로 이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어들고, 이로 인한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를 조금이나마 덜게 되었다.




여백이 생기면, 생각은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하나둘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신기한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도 멍하니 있는 시간이 생겼고, 샤워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이어졌고, 문득 글로 쓰고 싶은 문장이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나중에 정리해야지” 하고 흘려보냈을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붙잡을 수 있게 됐다. 아이를 키우며 사라진 건 내 능력도, 의지도 아니었다. 내 생각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시간을 늘리려 하지 않는다

대신 결정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 대해 스스로 묻는다.


이 고민은 꼭 오늘 내가 해야 할까

이 결정은 미리 정해둘 수 없을까

이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영역일까


잠을 줄이거나 애써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기보다, 꼭 필요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상 속에서는 불필요한 생각 피로감을 덜 받는 삶.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회복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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