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를 만들다 문득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동안 세상에 임팩트 있는 제품도 출시해 봤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일에 열정을 바치기도 했다. 디자인씽킹을 비롯하여 디자인 스프린트 등 다양한 도메인에서 다양한 디자인 프로세스도 시도해봤다. 그러면서 좋은 디자인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내가 잘 하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추려졌다.[1] 이는 주관적인 목록이지만, 어느 정도는 디자이너가 추구해야할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디자이너를 문제 해결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발자도, 인사 담당자도, CEO도 모두 문제 해결자이다. 오히려 디자이너는 너무 늦게 문제 해결자의 반열에 들어섰다. 문제 해결자라는 타이틀 보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가 중요하다. 디자이너의 진짜 무기는 추상적인 개념을 ‘형태화’하고 ‘경험화’하는데 있다.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결국 경험되는(tangible) 형태로 만들어 진다. 디자이너는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최종 결과물을 상상하고 만든다. 그렇기에 시각적인 원리와 인터랙션 방식에 대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위 UX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아래 이 부분이 너무 간과되곤 한다. 비전공자는 이 부분에 대해 꾸준히 훈련할 필요가 있다. 미(美)와 사용성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지금은 그냥 다른 서비스의 외형을 비슷하게 베껴도 어느 정도 돌아가겠지만, 다른 비지니스나 플랫폼으로 넘어갔을 때 first mover가 되기 어렵다. 회사에서도 이 부분을 고려해서 사람을 배치해야 한다. 물론 반대로 UI 디자이너는 형태화에는 전문가이지만, 시간 배분과 퀄리티 조절(혹은 희생)을 적절히 하여 전체 프로세스에서 정말 효율적으로 제품에 기여하고 있는지 고려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두가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회사 문화가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프로토타이핑은 개발자에게 넘어가기 전에 직접 구현하고 테스트해볼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또한 빨리 실패하고 깨달음으로써 중요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참고로 나의 경우는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400만 사용자의 욕을 먹는 일을 방지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다음 시대는 어떻게 될까? 아마 점점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다. 이미 우리는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는 것이 아니라 앱으로 배달을 시켜서 먹는다. 이전에 아날로그로 시작했던 경험도 이제는 디지털 서비스로 시작한다. 우버같은 서비스를 통해 더 이상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빌려쓰는 개념이 되었다. 본격적인 AR 시대가 오면 어떻게 사물과 인터랙션하게 될까? 블록체인 시대의 가입과 결제는? 결국 시대와 미디엄이 변하더라도 모든 것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형태여야 하고, 그것의 큰 부분은 시각적인 요소이다. 음성 인터페이스나 No 인터페이스가 잠깐 고개를 들었지만, 궁극적으로 시각적 인터페이스의 보조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AR이 활성화되면 3D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고, 디자이너의 형상화 능력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의 많은 일 중에는 반복적이거나, 창의성의 가면을 쓴 단순한 일들이 있다. 내가 동료들과 격월로 주최하는 디자인 스펙트럼 이벤트에는 100명 이상이 오시는데, 감사의 표시로 모두 이름표를 만들어서 드린다. 첫 몇 회는 일일히 이름표를 만들었는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지루한 면이 있었다. (물론 노가다를 즐기는 동료도 있고 존중한다.) 그래서 엑셀 시트에서 이름만 쭉 긁어서 넣으면, 그 수만큼 이름표를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Event Badges by David[2]를 만들고 배포했다. 아직 알파 버전에 불과하지만, 단순 반복 작업을 효율화할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브랜드 디자인과의 협업으로 클라이언트 기업에서 언제든 다이나믹한 로고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 수록 디자이너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프로세스를 개선하려는 방법들이 나오고 있다. 정희연님의 SD Changer나 Open Color가 대표적이다. 물론 디자인 시스템도 빼놓을 수 없다.
디자인 컨설팅을 하면서 클라이언트 내부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면 효율화와 자동화에 대한 욕심이 더 생긴다. 예를 들어, 10명의 디자이너가 광고 배너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사실 이는 어느 정도의 규칙을 넣으면 디자인 결과물을 내는 자동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구입하고 그것을 사고 관리하는 직원 한두 명만 두는게 훨씬 이득일 것이다. 이건 이미 존재하는 예시지만, 많은 클라이언트 기업들에게서 이런 기회 요소를 발견하곤 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프로그램 때문에 짤릴 위기의 디자이너라면? 나는 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면 이익이 커지고, 그에 따른 새로운 비지니스가 창출되거나 확장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효율화나 자동화를 하더라도 인력의 감축이 아닌 이동(shift)이 일어나거나 오히려 더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한 단위의 제품을 더 적은 인원으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직원이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반복적인 직장생활 하면서 가정에 충실하려는 사람도 있다. 사회와 기업은 이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도 있는 동시에, 개인도 향후 진로를 고민하며 기업과 사회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종 내부 발표자료는 딱딱한 보고서 형식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글자와 도형이 빽빽하게 차 있는 장표를 마주하게 된다. 이런 기업에서 과연 심플하고 직관적인 제품이 나올 수 있을까. 보고를 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에는 수 많은 비효율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비효율을 본적격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크진 않은 것 같다. 보고가 끝나면 한 장도 제대로 머릿속에 남지 않는 장표를 언제까지 만들어야 할까. 만약에 리서치 결과를 동영상으로 공유한다면?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동영상 툴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고 좋을텐데 말이다. 외부 광고는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임직원에게 전달되는 자료는 왜 이렇게 딱딱하고 초라할까? 나도 여전히 키노트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기회가 된다면 이 영역에서도 기여를 하고 싶다.
이미 많은 스타트업들은 데이터 기반으로 디자인을 하고 있기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3] 디자이너는 끊임 없이 사용자 입장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데이터 플로우)을 설계하고 검증하는 작업을 거친다. 산업 디자인 시대에는 디자이너의 철학과 직관으로, One-way 미디어 시대에는 정성적인 데이터 위주로 디자인을 한 것 같다. 지금의 디지털 인터랙션 시대에는 정량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정성적인 리서치가 곁들여져, ‘왜’ 라는 물음에 끝없이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다. 다만 앞으로 주목할 것은 인공지능의 역할이 중요해져서 이를 설계할 수 있는 디자이너(혹은 UX 리서쳐)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IDEO는 이미 인공지능 기업을 인수하고 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이미 내 페이스북과 옆사람 페이스북이 다 다르고, A/B 테스트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화된 제품을 만드는 것인지 모를 그런 중간 영역에 와 있다. 넷플릭스가 사용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오리지널 시리즈를 만들어서 대박을 친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아디다스같이 오프라인 매장 위주의 사업을 하던 곳도 개인 맞춤형 신발을 더 빠르게 만들어내기 위해 공장을 자국으로 옮겼다. 디지털 제품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제품도 이제는 점점 개인화되기 위해 데이터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데이터라는 것이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지니스와도 뗄 수가 없다. 애초에 디자인이 비지니스와 맞닿아 있지만,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 같다.
물론 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엄청난 함정도 있다. 먹이는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아직은 인공지능이 조개처럼 이물질을 먹고 진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먹는대로 싸는 돼지와 같다.[4] 기업이 의도적으로 A상품을 전략적으로 팔면, 분석된 데이터도 A상품이 최고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함정은 기업의 ‘비지니스 로직’이라는 마법의 가루를 섞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앞세워 사용자의 욕구보다 기업의 이윤을 추구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진정 원해서일까? 데이터만 보고 판단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사용자 관점으로 데이터를 제대로 다룰줄 알아야 한다.
나의 경우 데이터 기반 디자인을 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은, 데이터를 순순히 넘겨줄(?)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것과 이직, 그리고 사이드 프로젝트가 있을 것이다. 일단 사이드 프로젝트인 디자인 스펙트럼 웹사이트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올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구상 중이고, 내년에 현실이 되길 바라고 있다.
그 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며 앞으로 초점을 맞출 세 가지 영역을 정리했다.
무형의 것을 사용자가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형상화’ 능력은 두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앞으로는 플랫폼의 변화와 AR 등 새로운 기술들의 등장으로 그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는 고정된 스마트폰 스크린이 아니라 무한대의 디스플레이일 수도 있으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가 없는 인터페이스일 수도 있다. 여러 환경에서 빠르게 만들어보고 테스트할 수 있는 능력도 더 중요해질 것 같다.
2018년은 디자인 시스템의 등장으로 디자인계가 시끌벅쩍했다. 2019년은 디자인 시스템 뿐만 아니라 디자인 프로세스의 많은 비효율들을 디자이너가 자체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는 디지털 제품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아날로그 매체에서도 시스템화되고 자동화되어 ‘디자인 프로세스의 효율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있다.
데이터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고, 앞으로는 인공지능까지 더해지면서 디자이너의 데이터를 보고 다루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데이터 기반 디자인’에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데이터 그 자체가 아닌 그 안에 숨겨진 사람의 욕망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1] 회사 입장이 아닌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목록들이다.
[2] 좋은 이름 추천 받습니다.. 현재 대안은 Baaadges 정도 입니다. 기능에 대한 제안도 받습니다.
[3] 그러나 놀랍게도 아직 많은 기업들이 데이터를 수집하지 않고 있거나, 수집한다고 해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모른다.
[4] 나는 인공지능 전문가는 아니기에 확증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내가 경험한 인공지능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