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가 상용화되고 우리는 초 없이도 어둠 속에서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배터리 기술의 발전과 함께 1988년, 드디어 우리는 빛을 휴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헤드램프, 자전거등, 랜턴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스타트업 HeadSpin의 공동대표, 크리스(Chris)와 데릭(Derek)은 이 진화에 방점을 찍고자 했다.
그들이 제안한 것은 세계 최초의 모듈식 라이트였다. 목적에 따라 빛을 휴대하는 것이 아닌, 빛 하나로 다양한 목적에 맞추자는 것이었다. 아래 다이어그램과 같이 광원이 있는 메인 유닛을 상황에 따라 여러 마운트에 끼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시장을 봐도 가능성이 있었다. $2.3b 규모의 미국 휴대용 라이트 시장에서, 아웃도어 활동을 하는 미국인 중 반 이상이 둘 이상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두 개 이상의 휴대용 라이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휴대용 라이트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아이디어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디자인에 앞서 가장 먼저 배터리 조합을 고민했다. 전자 공학자가 미리 작업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제조 공정의 대략적인 복잡도와 제조 단가를 대략 예상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우리는 AAA 같은 상용 배터리를 사용할 것인지, 내장 배터리를 사용할 것인지, 배터리를 교체하게 할 것인지, USB로 충전만 되게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아래와 같이 이 조합들을 도식화하여 실제 사용 상황을 상상하며 장단점을 분석했다.
단지 이미지로만 그려 본 것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실제 있을 법한 상황을 만들어 사용성을 판단했다. 그 결과 내장 배터리를 사용하는 것이 가격은 조금 상승하지만 사용하기 가장 편리하고 견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배터리가 들어가는 액세서리의 수를 최소화하여 사용자가 다수의 기기를 충전하는 번거로움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업계 최초로 제품의 언어를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참고할 자사 제품이나 경쟁사 제품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방향성을 정해 놓지 않고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빛(삼원색)이라는 근원적 형태에 기인하여 컨셉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최고의 모듈 방식인 레고, 나뉘고 분열하는 세포, 그리고 전혀 엉뚱하게 타코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약 4주간 우리는 독특한 7가지 디자인 컨셉을 개발했다. 3D 프린팅도 하고, 종이로도 만들어 보면서 액세서리와 잘 결합될 수 있는지 확장 가능한 디자인인지를 탐구했다.
우리가 디자인 컨셉을 발전시키는 동안, 전자 공학자는 배터리의 부피를 계산했다. 최대 40시간의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배터리의 부피가 생각보다 커야 했다. 그래서 낭비되는 공간이 가장 적고 그립감이 좋은 둥근 사각형 형태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배터리 사이즈를 고려하여 실제 크기로 만들어서 손에 잡아보면서 테스트를 했다.
종이 프로토타입과 컴퓨터 모델링을 작업을 번갈아가며 최적의 형태를 찾아나갔다.
또한 3D 프린팅을 통해 커브, 각진 정도, 버튼 형태 등 상세한 부분들을 다듬었다.
최종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계속 프린트하며 테스트했다.
메인 유닛의 기본 형태는 둥근 사각형으로써, 너무 평범하거나 튀지 않으면서도 안정감을 주도록 만들었다. 부드러운 실루엣 라인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표면에 거친 느낌의 굴곡 패턴을 적용했다. 실리콘 재질의 굴곡 패턴은 그립감을 상당히 높여주어, 물이나 기름이 묻은 손으로도 안전하게 잡고 조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른 액세서리들도 마찬가지 개념으로 디자인했다. 장식적인 요소는 모두 배제하고, 아웃도어 액티비티의 거친 느낌과 빛이라는 속성이 가진 부드러움을 녹여냈다.
Flashlight
플래시라이트는 배터리를 내장하고 있으며, 메인 유닛에 연결하여 전체 사용시간을 늘려준다. 또한 스마트폰을 연결하여 충전하는 등 외장 배터리로 활용할 수도 있다.
Headlamp
Bike Light
Lantern
Wall Charger
우리는 여타 (못생긴) 휴대용 라이트처럼 서랍 어딘가 넣어 놓았다가 아웃도어 활동을 나갈 때만 가져가는 그런 라이트가 되지 않길 바랬다. 벽에 꼽아 놓아도 집안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고, 항상 충전이 되어 있다가 나갈 때 쉽게 뽑아서 나가면 되게 만들었다. 콘센트에 바로 꼽을 수 있는 이 충전기는 이 제품을 잘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액세서리다.
Website
웹사이트는 이 글을 작성하면서 반나절 동안 시간을 제한하고 만들었다. 제품을 광고한다면, 만든 사람이 가장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제품은 다양한 아웃도어 활동에 사용되므로, 타제품 대비 많은 기능이 있어야 했다. 나는 가장 적절한 버튼과 기능의 조합을 찾기 위해 도표를 만들었다.
하지만 도표를 통해서는 실제 사용성과 느낌을 알 수가 없었고, 가장 좋은 인터페이스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버튼을 누르면 실제로 빛이 나오고 작동되면 좀 더 판단하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종이로 만든 형상에 아두이노를 넣어 만들 수는 있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진짜같이 동작하는 제품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의사 결정을 할 수준의 프로토타입이면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스마트폰 화면으로 버튼 조작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면 하단에 버튼을 배치하고, 버튼을 누르면 화면 상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빛이 나오는 구조를 생각했다. 정해진 시나리오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비전 같은 click-through 프로토타입보다는 프레이머로 실제 누르는 대로 반응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오피스(샌프란시스코, 뮌헨, 서울)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프로토타입 링크를 보냈다. 누구든 링크를 누르면 바로 스마트폰에서 버튼을 조작할 수 있었다.
이 프로토타입은 빠른 의사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얘기하며 버튼 1, 2개는 너무 헷갈린다고 했으며, 3개일 때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버튼이 4개인 프로토타입도 만들어서 이메일로 공유했다. 비록 물리적인 버튼 수는 많아졌지만, 각 버튼에 하나의 기능만 매핑되어 쉬운 멘탈 모델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버튼 수를 고민하는 동시에, 위치, 크기, 손가락에 닿는 느낌을 검증하기 위해 간단한 종이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여러 번의 종이와 디지털 프로토타이핑을 거쳐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네 개의 버튼은 위치와 크기뿐만 아니라 표면 질감이 달라서, 어두운 곳에서 손의 느낌 만으로도 조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원 버튼은 실수로 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부보다 낮게 만들었다. 또한 액세서리와 결합했을 때도 일체감을 주도록 디자인했다.
버튼에는 일부러 아이콘을 넣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일시적인 사용성 향상보다 미적으로 아름답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원한다고 믿는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지만 4방향 버튼이 각 기능과 매핑되어 금방 익숙해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학습성(learnability)에 대한 검증을 했을 것 같다.
배터리 인디케이터는 전원을 누르면서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넣었다. 전원을 켜는 순간부터 남은 용량을 고려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적용하진 않았지만 Uvpaqlite 같이 어둠 속에서도 발광하는 재질을 적용했으면 조금 더 친절한 제품이 되었을 것 같다.
디자인 프로세스 초기부터 다양한 결합 방식의 장단점을 조사했다. 본체와 액세서리와의 결합 방식이 형상 디자인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웃도어용이므로 심하게 흔들거나 부딪히더라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동시에 쉽게 빼고 결합할 수 있어야 했다.
여러 가지 결합 방식을 조사하던 중 폴리마그넷이란 것을 발견했다. 이 자석은 특정 방향으로만 붙고 힘을 주어 돌리면 자성이 풀려 쉽게 떨어지게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해보니 두 부분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을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석이기에 자동차 등 임시로 붙여 조명으로 사용하는 등 부수적은 효과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 방식에 가능성을 느끼고 프로토타입을 제작했다.
하지만 폴리마그넷으로는 처음 의도했던 것처럼 작게 만들기 어려웠고, 단가 상승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래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희토류 자석으로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테스트했고, 생각보다 잘 작동했다.
작동하는 시제품을 만들자 짐작했었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났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메인 유닛이 풀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실제 완성품과 같은 무게로 만들어서 실험했다.) 그래서 기계적인 추가 결합 방식을 모색했다. 또한 전기 커넥터 단자를 적용할 위치를 물리적인 결합 방식과 함께 고민했다.
이제는 두 모듈 간 전기 커넥터가 밀착되어 연결될 수 있을 정도로 자성이 강해야 했고, 동시에 마찰력을 극복하고 90도 돌아가야 했으며, 기계적 잠금까지 되어야 했다. 사용자가 전기 커넥터 단자를 일치시키는데 신경 쓰지 않고 직관적으로 결합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었다. 우리는 결국 기계적 메커니즘까지 넣어서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잠금을 풀 때는 추가적인 버튼을 누를 필요 없이 힘을 더 주어서 돌리면 되게 하였다.
결합 메커니즘 완성 후 전자 공학자와 함께 실제로 두 모듈 간 전기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온전하게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우리는 오피스에 있는 초정밀 3D 프린터로 모든 부품들을 프린트하여 만들었다. 실제로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은 부품들이 작기 때문에 매우 정밀해야 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뿐만 아니라 자전거 마운트 같이 유연한 부분은 고무로 프린트했다. 또한 두 모듈이 맞닿는 부분은 빠르게 여러 버전을 만들어서 테스트하기 위해 레이저 커터를 사용했다.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이 부드럽게 돌아가면서도 안정적으로 잠금이 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이 제품은 2017년 가을 킥스타터 캠페인의 목표량 100%를 넘기며 성공적으로 제조에 필요한 자금을 유치했다. 현재는 완제품이 만들어져 후원자들에게 배송하고 있다.
Prototyping For Decision-Making
세계 최초의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은 도전이 된다. 참고할 제품이 없고,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각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였다. 화면으로 결정하는 것과 실제로 작동해보고 결정하는 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그런 면에서 목적에 맞고 문제를 해결할 적절한 수준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수준은 상황에 따라 간단한 스케치일 수도, 실제같이 작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능력에 프로토타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토타이핑은 빠른 의사 결정을 도와주어 디자인 프로세스를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Multi-Disciplinary Approach
종종 창의적인 해법은 다른 영역과의 경계에서 나온다. 빠르게 최적의 인터페이스를 찾기 위해서는 삼차원 형상을 만드는 산업 디자인 방식과 인터랙션 사용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디지털 디자인 방식이 모두 필요하다. 형상 디자인이 끝난 후 UI 및 인터랙션을 적용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여서는 안 된다. 둘은 분리될 수 없고 지속적인 반복 개선 작업을 거쳐 다듬어져야 한다. 고도화된 제품일수록 풀어야 할 문제는 더 복잡하다.
나 같은 경우는 최적의 인터페이스를 찾기 위해 보통 UX 디자인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앱 프로토타이핑 툴을 사용했다. 내가 산업 제품 디자인과 프론트엔드 개발을 포함한 디지털 제품 디자인을 둘 다 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Industrial vs. Digital Design Process
산업 제품 디자인을 하며 디지털 제품 디자인 프로세스와 비교하게 되었다. 우선, 둘 다 사용자와의 공감을 바탕으로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용자가 실제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필요를 발견하고 충족시켜주는 것 말이다.
둘의 다른 점은 출시하는 제품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산업 제품 디자인은 최적의 상태로 (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가면 수정할 수 없다.) 출시해야 하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빠르게 미완성 제품을 출시한다. MVP(Minimum Viable Product) 혹은 작은 기능 단위로 만들어 일단 출시하고, 그 후에 사용자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완성도를 높여간다. 행여나 치명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번복, 수정, 혹은 피봇이 가능하다. 반면에 물리적인 제품의 결함은 그대로 판매 부진과 악성 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제 사용상의 문제를 미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제품이거나 제품이 복잡할수록 더 그렇다. 때문에 오히려 디지털 제품보다 프로토타이핑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제작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제품의 경우 개발자와의 지속적인 협업이 필요한 것처럼, 산업 제품도 마찬가지로 기구 설계와 공장에서 금형을 찍어내는 과정에 계속 수정 보완을 해야 한다. 원래 의도한 디자인을 출시품까지 전달하기란 매우 어렵다. 본 제품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더 의도대로 나왔을 것 같다.
Sharing Progress, Sharing Happiness
어려운 문제를 마주칠 때마다 여러 가지 대안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도식화하여 동료들에게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매 번 상대방이 쉽게 이해하거나 흥미를 느낄 수 있게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프로젝트 막바지에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는데, 한국과 미국의 파트너가 바로 통화를 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조직이 작고 유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정이 아니었으면 이 제품은 원래 의도와 상당히 다르게 디자인되었을 것이다.
디자인을 클라이언트에게 넘기는 마지막 날, 아직도 내가 마음에 드는 수준의 디자인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디렉터는 그 마음을 아셨는지, 클라이언트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해 주셨다. 시계는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야근을 하지 않고, 스케줄과 결과물은 본인이 알아서 관리한다.) 일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디지털 제품 디자인(UX)과 산업 제품 디자인(ID)을 둘 다 하는 특이한 캐릭터 중 한 명인데, 이 제품은 나의 두 번째 산업 디자인 프로젝트이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제품도 세계 최초였다. (이렇게 된 거 세계 최초만 만들어볼까..)
이전 글에서도 잠깐 밝혔지만, 디지털 경험과 물리적 경험은 뗄 수가 없고 점점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둘 다 할 수 있으면 더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결된 관련 분야 - 소재, 제조공정 vs. 데이터 분석, 개발 - 는 다르지만, 디자인적으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분간 계속 특이한 캐릭터가 되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