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사수 없이 일하며 나는 끝없이 방황했다.
디자인 사수 없이, 스타트업 소속 디자이너로 일했던 3년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하게 됐다. 독립 1년 차에 1억이 넘는 돈을 벌게 되어 아직도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빠르게 많이 번다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1명의 디자이너로 어떻게 독립할 수 있었는지 공유하고자 쓰는 이야기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디자인 사수 없이 일하면서 느꼈던 점, 그리고 그때 알았으면 정말 좋았을 내용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
당장 대학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대학교 2학년, 디자인과 전혀 관련 없는 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 과제를 하면서 디자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디자인을 잘하는 친구들과 함께 해도 됐지만, 그러기엔 나는 성격이 너무 급했다. 말한 것을 바로바로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혼자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했고, 그래도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것 같아 바로 디자인과를 수강하게 됐다. 어떤 각오나 깊은 생각 없이 그렇게 디자인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진행하는 디자인 프로젝트 과제들이 재밌었다. 실제 현장에서는 더 재밌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고, 곧바로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하루하루를 밀도 있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빠르게 변화하는 스타트업에 취직하게 됐다. 대학교 4학년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인턴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스타트업의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는 아니었다. 스타트업에 취업한 후 빠르게 성장해서 내 브랜드에 적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전공이었기 때문에 디자이너로 취업했고, 그곳은 조그만 마케팅 스타트업이었다. 나는 초기 멤버가 되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디자인 사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간 곳에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라고 얘기했다. 정말로 그럴 것이 팀에 디자이너는 오롯이 나 하나였다. 당시 학교 다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가 있었는데, 사수가 없는 곳에서 일을 시작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배울 수 있는 폭이 좁아진다는 이야기. 그런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도 디자인 사수가 없는 곳에 들어가게 됐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혼자서도 노력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수가 없어도 현장에서 일하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내 전공이 아니라 다른 전공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만의 장점이 생길 거야!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나한테는 그랬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직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에 성장에 공백을 느끼진 않았다. 대학교에서 배우던 내용과 현장에서 쓰는 디자인 내용은 결이 달랐다. 예산과 마케팅, 그리고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에 따라서 조금씩 프로젝트가 변경됐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디자인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기였다. 새로운 사람들, 전혀 모르던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일하는 게 즐겁다고 느껴졌다.
하는 일에 패턴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어떤 일을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대충 셈이 됐다. 그런데 점점 일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업물이 자기 복제를 하고 있었다. 팀 내에서 디자인에 대해서 깊게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좋다, 애매하다, 와 같은 추상적인 언어로 피드백을 받았다. 충분히 디자이너 커뮤니티에 들어가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디자이너 각자의 상황이 모두 달라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고립됐다고 느껴졌다.
분명히 내 브랜드를 시작하려고, 배우려고 스타트업에 들어왔지만 예상했던 상황과는 아예 달랐다. 스타트업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대다수의 스타트업이 어떤 문제에 부딪치는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작은 규모의 경우 더욱 그렇다. 게다가 마케팅 관련 업체다 보니 끝없이 변수가 만들어졌다. 팀 내에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변수에 따라서 프로세스가 시시각각 변했다.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속한 팀은 그랬다.
당시 나에게 3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조금 더 버텨서 슬럼프를 이겨낼 것인가, 다른 회사로 이직할 것인가, 아니면 내 브랜드를 시작할 것인가. 고민은 길게 이어졌다. 해온 것에 대한 아까움과 안정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과신, 욕심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엉켜 있었다. 망설임이 가장 컸다. 고민 끝에 내가 정한 것은 독립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디자이너 부사수를 채용하기도 했지만, 내 속이 비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더 이상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방황하더라도 제대로 방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돌아가지 않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26살, 독립하고 나서는 정말 수많은 경험을 했다.
최대한 빈 공백의 시간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디자인 제품을 팔아보기도 하고, 세상에 없던 제품을 발명해 특허를 내기도 했다. 무료로 구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찾아내는 소소한 꿀팁들을 얻고, 생판 모르던 남의 제품을 대신 팔아보기도 했다. 디자인과 무관해 보이는 책도 닥치는 대로 읽어보고, 직원을 고용해보기도 했다. 회사 안의 디자이너로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고 사람들이었다. 내 안에서 응어리져 있다고 느꼈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자고 생각했다. 마음껏 부딪쳐보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는 것. 조직 안에서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찾아 그냥 시도해봤다.
그 과정 속에서 '이 내용을 과거의 나에게 알려 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나는 끝없이 불안해했다. 너무 실력이 안 느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일이 나중에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와 같은 막연한 불안이었다.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냥 왜 불안할까, 하며 마음을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엔 그랬다.
나는 한참을 돌고 돌아 걸었다. 시간을 아끼고 좀 더 자기 발전을 위해 애썼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하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사수가 없는데 취업해도 괜찮을까요?'하고 묻는다면 흔쾌히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나에게 시간을 내어 준다면 옆에 앉아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다.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면서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에 부딪칠 수 있는지,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은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
독립 3년 차.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2가지 작은 바람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 같은 상황에서 막막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들에 대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지난 나를 담담히 돌아보는 마음.
앞으로는 작은 기업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내용들을 여러분과 공유하려고 한다. (1) 이제 막 시작하는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들과, (2) 브랜드로 성장하고자 하는 디자이너들을 위한 내용들을 꾹꾹 담아 연재할 계획이다. 디자이너로서 생존하면서 얻게 된 지식들이다.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잘한 방황과 시도들로 얻어낸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디자이너로서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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