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 Magazin 01. 사진이냐? 그림이냐?
오래간만에 일찍 들어와 저녁을 먹고 나니, 엄마가 내 앞에 앉는다.
“그림 하나 그려주라.”
“어떤 그림?”
“나 좀 그려라. 크게, 아주 큼지막하게 그려줘라.”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고민을 하다 엄마의 뒷 배경에 살아온 시간을 보여주는 나무의 나이테 같은 지문들을 그려 넣었다. 엄마의 손에도 오래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있을 테니. 인물을 크게 그린 적이 없어 어려웠지만 사실대로 그려서 엄마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그림을 보고 엄마는 '버럭' 화를 낸다.
“아니, 너는 디자인을 한다는 애가 이렇게 똑같이 그리면 이게 그림이냐?”
“그럼 그림은 어때야 하는 건데?”
“내가 나이 들어 보여서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는 줄 알면서. 좀 더 아름답게 그려야지. 젊게 그리거나. 이게 사진이냐? 그림이냐?”
“…”
엄마는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셔서 어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면 손사래를 치며 질색하신다.
“나 안 찍는다. 잘 안 나오는 거 알면서.”
사진 찍는 것을 끔직히 싫어하는 엄마가 요구하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생각하다가 엄마의 주문대로 그리기로 했다. 엄마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시집을 오기 전 꿈 많던 아가씨였을 때가 아닐까? 그 시절 사진은 가지고 있는 것이 한 장도 없으니 상상해서 그릴 수밖에 없지만 맘에 들면 영정 사진으로 쓰겠다는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설마 내가 그린 그림으로 영정 사진을 대신하진 않겠지만.
야근이 많은 디자이너이다 보니 새벽마다 조금씩 그려 완성된 그림을 엄마는 아주 만족해하셨다. 아마 배경으로 가장 좋아하는 자주색 목단을 그려 넣어서가 아니었을까? 꽃을 좋아하시니 아마 본인의 얼굴보다는 그 옆에 꽃이 좋았을 게다.
나도 엄마의 젊은 날을 생각해보면서 그린 그림이라선지 그림에 마음이 갔다. 태어나서부터 내게는 엄마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가장 많이 부른 말이 엄마지만, 엄마에게도 청춘과 꿈 그리고 시들지 않았던 푸르른 시간이 있었을 거란 생각을 그 전에는 못 해봤다. 그래서 처음 그림을 그릴 때는 '젊음’과 ‘아름다움'도 엄마와는 낯설게만 여겨졌다. 당연히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을 텐데 왜 한 번도 물어보지도 않았을까? 그럼에도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그림 제목에만 ‘엄마의 꿈’이라 붙였다가 ‘오래전, 그녀의 꿈'이라 바꾸었다. 분명, 이 꿈을 꿀 때는 엄마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내가 없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림을 그린 지 다시 오래되었다. 엄마가 불현듯 나를 불러 다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그리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바쁜 딸과 마주 앉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그림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서로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시간 동안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너 계속 그림은 그리지? 나 때문에 안 그리는 것은 아니지?"
집안 사정으로 포기하게 했던 미술대학 진학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때문일까? 아님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꾸 그려라. 그래야, 손이 그것을 잊지 않는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꽃 자주색 목단이 화단에 피어있는 것을 얼마 전, 삼청동에서 보았다. 파주로 이사 오기 전 살았던 연희동 마당에는 아이 얼굴만큼 큰 목단이 피었다. 그 꽃이 피면 그리 좋아하셨는데, 연희동 마당에는 올해도 자주색 목단이 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