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자인너마저 Mar 19. 2020

익숙한 것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

사토 다쿠의 '대량 생산품의 디자인론'을 읽은 후

어금니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의 자일리톨 심벌마크


#대량 생산품의 디자인론


어느 순간 갑자기 엄청난 인기를 얻은 후, 지금은 너무 흔해져 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롯데 자일리톨 껌이 그중 하나인데요. '껌은 치아에 나쁘다'는 기존의 인식을 뒤집고 '치아에 좋은 껌'이라는 새로운 접근의 상품이었습니다. 충치를 유발하지 않는 감미료인 '자일리톨'을 배합한 껌으로 무려 1997년에 출시되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이내 너무 흔해져 버려서, 늘 거기 있어서 이 껌 패키지의 아름다움을 잊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독서를 권장하고 있는 관계로...) 최근에 읽은 책에서 이 가치를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대량 생산품의 디자인론'이고 지은이는 '사토 다쿠'라는 일본의 전설적인 디자이너입니다.


농심 바나나킥


#왜 이렇게 디자인되었나


2014년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였는데요. 한국에서 보내온 과자를 독일 친구들과 맥주 안주로 먹을 때였습니다. 과자가 바나나맛이라는 것에 먼저 놀란 독일 친구가 바나나킥의 패키지를 보고는 한 번 더 놀라더라구요. 이 캐릭터가 너무 웃기다는 겁니다. '축구화를 신고 있는 바나나'가 축구공을 뻥 차고 있고 위에 원숭이가 지켜보는 이 그림이 독일에서만 살았던 그 친구에게는 유독 낯설었나 봅니다. 늘 편의점과 마트 과자 진열대에 있어서 몰랐던, 무심히 지나갔던 이 패키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 이유가 있었겠죠. 실물 바나나를 겉면에 보여주기에는 식감을 자극하기가 힘들 테고, 이름은 바나나킥이지만 실제로 바나나처럼 휘감기는 축구공의 경로를 보여주기에는 과자의 맛과 연관이 없고... 그래서 식감을 자극하는 노란색을 전면에 배치하고 나름의 이목을 끌기 위해 캐릭터를 사용하고 보색인 보라색으로 제품명을 노출했을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이렇듯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죠?


사토 다쿠가 디자인한 쿨민트 껌


상품은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패키지 디자인은 많이 팔기 위한 디자인이다.


위 사진의 롯데 쿨민트 껌은 편의점이나 역 가판대나 어디서든 어떻게 진열되든, 심벌마크가 잘 보이도록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대량 생상품의 디자인은 상품이 놓이는 장소(환경)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식품이다 보니 정갈한 아름다움과 침샘을 자극하는 '시즐감 sizzle'을 균형 있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디자인 팁으로는 진열장 위에서 패키지의 윗면과 옆면의 디자인이 거의 동시에 보이는 것을 깨닫고 디자인할 캔버스를 넓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상품의 지속 가능성을 책임져라


대량 생산품의 경우 하루에 몇 백만 개씩 '대랑'생산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자원 문제, 제조 비용, 유통과 폐기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도 얽혀있어서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행에 의존하고 튀는 것만 중시하는 디자인은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세월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20년 이상의 세월을 버텨낸 자일리톨 껌의 패키지 디자인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대량 생산품에서 사용되는 디자인을 예로 들고 있지만, 디자인 전반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디자인은 과연 좋은 디자인일까?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디자인일까?(ex. 제작과 유통과정까지 고려하는 디자인)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시각적인 요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디자인'은 생각보다 넓은 범주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보다 뛰어난 디자인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 디자이너의 임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으로 정보를 제어하다


사물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관찰하여 소비자에게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 말은 쉽지만 모바일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에게는 하루하루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커머스 서비스의 UI를 디자인하고 있다 보니, 글자의 크기, 버튼 하나, 선 하나의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모바일 서비스야 잘못됐을 때 개발자와 협의하여 다시 고치면 되지만 대량 생산품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일본어는 세로 글줄이 참 시원시원하네요
메이지 '맛있는 우유'

사토 다쿠는 소비자가 제품을 멀리서 봤을 때 전달해야 하는 인상과,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여줄 정보를 구분하여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바탕색과 파란색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가는 선은 멀리 서는 안 보이지만 가까이에서는 보이듯 거리에 따라 정보가 바뀌는 것이죠. 제품의 정면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흰 우유가 유리컵에 담기고 있는 모습도 멀리 서는 그냥 흰 바탕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유리컵이 있다는 것을 소비자는 알게 되죠. 바로 이것이 앞서 말했던 '시즐감'의 예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5미터 거리에서는 막연히 상품의 골격과 컬러가 보이고, 1미터 앞으로 다가오면 다양한 정보들이 보이는 것이죠. 정보는 단계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읽힌다. 이것은 모바일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모바일에서 상품을 살 때 읽게 되는 정보의 순서


일반적인 모바일 커머스에서 고객은 위와 같은 형태의 상품 리스트를 보게 됩니다. 대략적인 레이아웃을 파악한 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품의 이미지와 굵은 폰트로 강조한 가격과 할인율 이겠죠. 그다음 상품명과 혜택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마지막으로 부가 정보인 후기와 평점 등의 작은 정보들을 읽게 됩니다. 정보를 단계에 따라 순서대로 파악하는 것이죠. 이처럼 오프라인의 상품 패키지 디자인과 모바일에서의 상품 구매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 방식을 내려놓자


디자이너는 자칫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표현력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이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클라이언트, 혹은 소비자)과 환경을 주체로 생각하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로 디자인을 한다면, 작은 차이에도 전달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정수기 회사 클린수이의 CI


기업은 저마다 생각과 방침, 이념이 있으므로 그때그때 상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저도 여러 회사에서 일해본 결과 각 회사마다 바라는 인재상이 다르고, 또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의 기술과 경험은 정말 필요한 순간 발휘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관계란 그런 것 같습니다.


빨강의 존재감


아래 사토 다쿠의 글을 덧 붙이겠습니다. (내용 조절을 위해 책 내용에서 약간의 수정을 했습니다.)


기업의 CI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로고마크를 보기 좋게 디자인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로고마크에는 기업 이념이 담겨야 하기 때문에 기업의 이념을 명확하게 재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이념을 공유했고, 교육 관련 책도 제작했으며 함께 로고마크를 검토했다. 이러한 소통과 이해 덕분에 물과 환경을 취급하는 기업은 대개 파랑과 초록을 선호하지만, 강렬한 빨간색의 사용을 이해해주었다. 그랬더니 마트에서는 파랑과 초록이 강조된 타사의 제품들 속에 빨간색이 굉장한 존재감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사토 다쿠에게 디자인이란

TSDO의 다양한 디자인 결과물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주 1회라도 초등학교에 디자인 수업이 있었으면 한다. 대학에 와서야 디자인 공부를 하면 너무 늦는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사토 다쿠에게 디자인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배려'이기에 대학에 와서 배우기에는 너무 늦다는 다소 과감한 표현이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디자인은 도덕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그리고 사용자에게 더 편리하고 유익할지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디자인이고 또 그것이 곧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사토 다쿠의 [디자인 해부] 전시 @21_21 Design Sight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디자인의 본질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래 사토 다쿠 디자이너가 대표로 있는 TSDO의 소개글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지금의 커리어에도 새로운 경험에 도전한다는 말이 참 멋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www.tsdo.jp/

https://www.designboom.com/design/designboom-china-taku-satoh-interview-branding-mindpark-05-17-2018/

https://honestart.tistory.com/33

   

매거진의 이전글 쉽게 무너지지 않는 UX/UI 디자인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