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서랍

짝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by 이엔에프제이


해질 무렵이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곤 한다. 마치 오랫동안 흠모하던 누군가를 마침내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 까닭에 밤 산책을 즐기게 됐는지 모른다.


나는 주로 집 근처 한강변을 따라 걸었다. 은빛 물결이 평온을 깨트리며 나를 부를 땐 무의식 중에 멍 때리며 서 있기도 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던 강변만의 멋스러움이 사그라들자 어둠은 기다렸다는 듯이 강물을 덮쳐버렸다. 낮의 화려함은 온데간데없고 어둠에 갇힌 강물은 나만큼 불안해 보였다. 뭔가를 완벽하게 해낸 보상 뒤에 오는 기쁨은 잠깐이고 숨겨진 공허함이 느껴진 이유는 뭘까 싶었다. 나는 완벽한 삶을 그리고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 늘 중간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 변화는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다. 가끔 표정 관리를 인지하지 못할 거 같은 얄팍한 생각 때문에 밤의 침묵을 찾는 것인지도 몰랐다. 침묵이 주는 힘은 놀라웠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홀로 걸어도 누군가와 같이 걸어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간혹 주홍 불빛의 안내를 받곤 했다. 혼자 만의 시간을 즐기기엔 금상첨화였다. 단순하게 살다가도 희한하게 밤이 되면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확장되었다. 이를 테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답이 떠오르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이 생기기도 하며, 삶에 있어서 더하고 빼야 할 것들이 정리가 되곤 했다. 그러다 문득 나를 위한 쇼핑 목록이 생각나면 즉흥적인 구매가 주는 기쁨의 호사도 누려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글감이 떠오를 때까지 무작정 밤 산책을 하는 건 다반사였다. 운 좋게도 단번에 생각나는 것들은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동안 제법 완벽하게 전체적인 글의 구상이 짜이곤 했다. 느낌이 좋았다. 작가의 서랍으로 들어간 시간이 민망할 정도로 마음은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왠지 퇴고를 하지 않아도 완벽할 거 같은 예감이 들자 발걸음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밤의 침묵과 동행하는 길이 처음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곧장 집으로 가는 게 싫었다. 옆길로 빠져 노가리를 좋아하는 지인을 불렀다. 약간 허름해 보인 건물이긴 해도 실내의 조명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원래 뜬금없이 밤에 연락할 사람 아니었잖아."

"있잖아, 나 곧 유명 작가 될 거 같아. 그래서 미리 축하주 마시고 싶어서."

"뭐라고? 참 나. 진짜 작가가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래 미리 축하해 줄게."

"고마워. 오늘따라 맥주보다 노가리가 더 맛있네!"

짧은 대화를 통해 속내에 가득 찬 희망사항이 테이블에 야무지게 노출되고 말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긴 하지만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작가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이를 어이할꼬. 충만하던 자신감은 온 데 간데없고 도저히 민낯으로 글을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깜깜한 밤에 열어나 볼걸,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발갛게 달아 오른 시간은 어쩌자고 내 안에서 멈춰 버린 걸까. 그저 야속할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을 만큼 매사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마음만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조급함을 내려놓고 즐기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말도 가슴까지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끄럽지만 그게 나였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이미 탑 꼭대기까지 올라간 자존심의 추락으로 한동안 온몸이 아팠다. 나를 알아주기는커녕 군데군데 생긴 멍 자국을 보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미련이 한없이 안쓰러웠다. 다시 찾아온 밤 그리고 침묵. 짝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