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대화

노란 쓰레기통으로

by 이엔에프제이


주말이었다. 나는 늦잠을 자고 싶었으나 빌어먹을 정신이 눈치도 없이 깨버렸다. 어영부영 시간만 축내느니 차라리 집 근처 뒷산이라도 오르면 나을 성싶었다. 엊그제 새로 산 기능성 티셔츠와 같은 재질의 바지를 입었다. 물과 휴대전화를 챙긴 후 집을 나섰다. 아담한 산책길을 지나 막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주변에서 조금 특별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듯 아닌 듯, 내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던 막막함과 혼란스러움이 호주머니 안에서 앞다투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나의 두 감정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길 벗어나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 생각할수록 막막하기만 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혼란스럽기만 하더라고. 돈을 벌 기회조차 빼앗는 세상이 된 것 같아 씁쓸해. 내 집 마련의 꿈은 남의 얘기로만 들리는 것 같아.

-맞아. 뭔가 기대를 해볼 만한 이유를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막막할 뿐이더라고. 더군다나 직장에서도 요즘 위태위태하거든.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견디다 보면 흔히 말하던 좋은 날이 오긴 하려는지, 아무것도 확답을 받을 수 없다 보니 그저 혼란스럽기만 해.

-그러게, 말이야. 걱정은 이미 저 산을 오르고도 모자랐는지 오늘 또다시 불러들이잖아. 걱정 따윈 이번에 다 놓아버리고 올 작정이야. 의지적으로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하염없이 막막하게 살 순 없잖아. 최소한의 노력은 해 봐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거든.

-그건 인정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수 생활한 지 벌써 십 개월째야. 하루라도 빨리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그동안 모아 둔 돈으로 코인을 샀더랬어. 운이 좋았던지 몇 배의 수익을 챙겼지. 그러다가 다른 코인에 한눈을 판 거야. 거의 몰방한 셈이지. 조만간 서울 중간 어디쯤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어. 그러곤 방을 구하러 다닌 거야. 마침 마음에 든 빈방이 있더라고. 꼼꼼히 살펴본 후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금 일부를 송금했어. 그런데 그날 이후 믿었던 코인에 대한 배신이 혹독한 대가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많이 혼란스러웠어.

-힘들었겠네. 어쩌면 지금까지도 막막할 테고. 한때 야무진 꿈을 꾸게 했던 코인에 대한 미련은 어디쯤 있어? 이참에 아예 이별할 참이야?

-잘 모르겠어. 영영 이별은 쉽지 않을 거 같긴 해. 왜냐하면 현재 다른 방법으론 그나마도 돈을 벌 수가 없기 때문이지. 혼란스러운 요즘 세상 정말 싫어. 근데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삶을 쉽게 포기하진 않아. 절대로!

-막막한 세상에 뭔가 새로운 희망이라도 있는 것처럼 잔뜩 기대되는 말인걸.

-그나마 다행일세. 그나저나 지금 산 중턱쯤 오른 것 같은데, 우리의 삶도 중간 어디쯤 와 있는 건 아닐까. 젠장 여기서 또 다른 갈림길이라니. 곧장 정상으로 가는 길과 쉬엄쉬엄 풍경을 즐기면서 가는 길 중에서 탁월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혼란스러워.

-선택 앞에선 늘 막막한 거 같아. 오늘은 쉬엄쉬엄 풍경을 즐기면서 가는 길을 따라가 볼 참이야. 가는 길에 무거운 주머니를 털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 같단 생각이 집요하거든.

-오, 그거 괜찮은 방법일세. 뭐랄까.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해결사 같기도 하고. 요즈음 어쩐지 발걸음이 무겁더라니, 온갖 잡동사니 감정이 다 들어 있던 거였어. 제기랄!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대화를 듣다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구름이 잔뜩 낀 산속에 노란 지붕 같은 게 얼핏 보였다. 뭘까,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시선은 지붕을 따라가지만, 알게 모르게 무거워진 육체는 질질 끌려간 듯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간신히 도착해서 보니 그야말로 쓰레기를 모으는 하찮은 쓰레기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푸르른 산속에 노란 쓰레기통을 설치했을까. 무척 실망스러웠다. 막 돌아서서 내려오려는데 커다란 문구가 애원하듯 나를 부르는 듯했다. 솔직히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인심 쓰듯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배고파요, 감정 쓰레기는 여기에 놓고 가세요!>

뭐지? 나는 노란 쓰레기통을 꼼꼼히 살펴볼 작정이었다. 그 순간 뭔가를 야무지게 다짐한 거 같지만, 왠지 자신 없는 태도로 출입문을 슬쩍 밀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정면에서 마주한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당신이 버리고 간 감정 쓰레기를 매일 한 번씩 불로 태웁니다. 그 잿더미를 보기만 해도, 설마 하며 피식 웃던 당신의 입꼬리만 보아도, 저절로 배가 부르거든요. 도와주실 거죠?”

둘러보니 다양한 감정 바구니가 손님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어 주고 싶었다. 바지 주머니를 막 내리려는 찰나였다. 주인의 허락 따윈 아예 무시한 채, 답답한 공간을 피하고 싶었던 막막함이 감정 바구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뒤이어 따라 나오던 혼란스러움도 동행할 준비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텅 빈 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홀가분함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릴 듯 말 듯 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집중해서 들어 보았다. 마치 나를 중심으로 천사들이 둘러싸여 합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횡재하는 기분이었다. 연거푸 상승하는 코인 따위로는 절대 가늠할 수 없는 황홀함이었다.

살다 살다 주머니가 또다시 무거워지거든, 그때마다 거기 그 산에 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