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있다는 것에 반하다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 지인과 함께 홍콩과 마카오로 여행을 갔다. 무엇보다 홍콩에선 쇼핑하고 마카오에선 카지노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설렘을 안고 마카오에 입성한 우리는 가장 멋있어 보이는 어느 카지노 앞에 섰다. 입구에 서 있는 매니저가 어색한 웃음을 띠며 우릴 보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들어가기 직전 우린 각자 똑같은 금액의 돈을 나눠 들고 서로의 행운을 빌며 흩어졌다.
나는 긴장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의 시선을 압도적으로 사로잡은 건 황금빛 장식과 어우러진 실내장식이었다. 화려한 불빛에 의해 더욱 빛나는 도구들을 보니 약간 주눅이 들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무표정인 채로 테이블 게임에 시선이 고정된 사람, 슬롯머신에 집중하는 사람 그리고 자꾸 자리를 옮기며 여기저기 구경하는 사람 등등. 그들은 모두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제법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였지만 순간 딜러들이 유혹하는 손짓에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가까스로 그들의 시선을 피해 비교적 한산한 쪽 슬롯머신 앞으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슬슬 승리욕이 생기며 나의 두 눈동자엔 힘이 들어간 듯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최대한 차분하게 안정시키며 버튼을 하나씩 터치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빛의 속도로 예상을 빗나갔다. 어이없는 상황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빼앗긴 허탈한 마음을 만회하고 싶은 까닭에 두 번, 세 번 하면 할수록 주머니는 텅 비워지고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해 왔다. 무섭고 두려웠다. 분노의 게이지가 폭발 직전까지 올라가 쉬어가는 타임이 필요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 카지노에는 왜 거울과 시계와 창문이 없는지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카지노의 분위기에 점점 익숙해질 즈음, 그곳에 더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그만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솔직히 내겐 힘든 결정이었다. 좀 더 머무름을 택하자니 은근히 겁이 났다. 그렇다고 이대로 나가자니 무언가 아쉬움이 남을 거 같아 딱 한 번만 더 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포기가 될 성싶었다. 나는 더는 잃을 것도 없는 마지막 동전을 미련 없이 집어넣었다.
그런데 ‘어머, 이게 웬일이지?’ 결과는 대박이었다. 보너스가 계속 터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본전을 회수했다. 불안했던 마음은 어느새 환희의 기쁨으로 변했다. 아니나 다를까 상상을 초월한 쾌감은 경험자만이 누리는 어떤 특권 같았다. 이렇게 몇 번만 더하면 엄청난 돈이 수중에 들어올 것 같은 예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찰나에 빠른 속도로 많은 생각과 갈등이 번쩍이며 교차했다. 참 간사해 보였지만 그게 나였다.
‘아, 바로 이 맛이었구나. 느낌이 딱 좋은데 어떻게 하지? 누군가 내게 벼락부자가 될 운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지금이 그 타임 아닐까?’ 순간 팔랑 귀를 가진 나는 거의 구십구 퍼센트 이상 그 운을 실험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갈팡질팡 생각의 대립이 팽팽하여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지인이 일찌감치 빈털터리가 되었다면서 어느새 곁에 와서 부추겼다.
“잭폿을 터트려 홍콩에서 명품 가방 하나 사야죠. 빨리 다시 도전해요.”
“좋아요. 신상 명품 가방 끌리는데 그럼 화끈하게 몰방해 볼까?”
“맞아요. 느낌이 올 때 확 댕겨야죠. 빨리빨리.”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소심한 면이 있어 그마저 잃어버린다면 명품 가방은 고사하고 없던 병이 생길 거 같아 두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분을 삼키지 못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할 것 같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그만 발목을 잡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냥 단세포적 사고가 발동했다고 해야 할까? 수없이 흔들어대는 갈등을 과감하게 접고 생에 처음 맛보았던 대박의 기쁨을 그대로 만끽하기로 했다.
어쨌든 첫 경험이었던 카지노의 유혹은 달콤한 솜사탕 같았다. 행여 머뭇거린 틈을 타고 어딘가에 남아 있을 아쉬운 미련이 흔들어 놓은 팔랑 귀 안으로 쏙 들어올까 싶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도 무거운 발걸음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음을 감지한 후, 우린 더 지체하지 않기 위해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여 밖으로 나왔다.
멈춰야 할 때,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카지노의 경험은 내 삶에 있어 단 한 번이면 충분할 거 같았다. 벼락부자와 같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지 않는다면 다시 불안이 엄습해 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무엇보다 오래 살고 싶은 까닭에 카지노 게임은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밤, 마카오의 야경이 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서 포트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저녁 식사를 했다. 명품 가방은 못 사더라도 짜릿한 유혹을 이겨낸 기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