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정전

급하지 않은 생각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by 이엔에프제이


학창 시절에 선미는 자그마한 체구에 까만 안경이 유난히 잘 어울렸다. 귀여운 눈웃음은 선미의 매력이었다. 친구들을 세밀하게 잘 챙겨주는 천성 또한 일품이었다. 그래서일까 선미는 늘 인기가 많았다. 많은 친구로부터 피할 수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가 아는 선미의 삶엔 어떤 세상 어둠도 끼어들지 못했다.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져 마치 세상을 다스리며 사는 거 같았다. 그런 선미도 가을이 오면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탔다. 벚나무 초록 잎이 어느 틈에 빨갛게 달아올라 마지막 가을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미는 통증을 동반한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들과 여행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워낙에 꼼꼼하고 완벽한 성격을 가진 선미는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 건강검진을 받아야만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선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얘들아, 난 그냥 다음 기회에 가야 할 거 같아.”

“어머, 왜?”

“그냥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선미는 친구들과 짧은 대화를 마치곤 몇 주째 두문불출이었다. 뭔가 생각보다 큰 충격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었지만, 자세히 물을 순 없었다. 그 후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엄청난 일들이 선미의 삶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동정심으로 받을까 싶어 조심스러웠다. 평생 꺼지지 않을 것처럼 화려하게 빛나던 불빛이 어느새 빛이 바랜 어둠이 되어 흐느적거리고 있음을 발견한 날엔, 선미는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선미의 통증이 그대로 전이가 되는 듯 듣기만 해도 마음이 시렸다.

하늘은 어쩌자고 이제 막 마흔을 넘어선 선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지, 때때로 원망 섞인 불평을 분이 풀릴 때까지 하늘을 향해 쏘아댔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에 그렇게라도 선미의 마음에 쌓인 응어리들을 대신 털어주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통증의 흔적을 깨끗하고 완벽하게 다 걷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거리엔 울긋불긋 감정 나들이가 한창이었지만, 선미는 단 한 번의 미소도 보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병원으로 들어갔다. 기필코 완치 판결을 받아낼 작정이라도 한 듯 선미의 심리상태까지도 안정돼 보였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폐에서 뇌까지 이미 암세포가 다 침범한 상태라는 걸, 차마 선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전문의답게 침착하게 말해주었다고 했다. 선미의 희망이 한순간에 깡그리 날아가 버린 차가운 병실에는 깊은 정적만이 채워졌다. 울어야 할지, 못 들은 척 태연하게 반응해야 할지 애써 정리해 둔 선미의 마음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삐거덕거렸다.


선미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와 친구들은 여행을 떠났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그들 또한 자신의 삶을 위한 귀한 시간이라는 걸 알기에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하루를 지날 때마다 선미의 빈자리가 더없이 컸다.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함께 걸으며 삶을 이야기하자던 그녀였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고, 호수 가운데 작은 통로를 지날 땐 아린 가슴을 다독여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미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 뿐이라서 내내 착잡했다.


나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선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예감은 언제나 백발백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길, 제발 아니길 빌었다. 며칠 후 결국 받지 말아야 할 편지를 받고 말았다. 프레임 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선미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순간이 눈부시게 좋았던 것은 당신들 때문이었노라고, 마지막 온 힘을 다하여 말하는 듯했다.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힘겹게 투병했을 선미의 고통스러운 삶의 시간에 더는 어떤 불도 켜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아니 눈을 뜨고 있어도 어둠만이 존재하는 깜깜한 세상, 모든 것이 낯설어 적응이 잘되지 않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이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에게서 온 가을비가 추적추적 쓸쓸한 마음 위에 보태졌다. 이 가을 또 어떻게 견뎌낼까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삶에 마지막 정전이 오기 전 누구를 위함이 아닌 오롯이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