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다운 것을 찾기로 했다
분주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식탁에서 가족이 마주한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아이들은 그마저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먹는 것보다 차라리 잠자는 것이 낫다며 투덜거린다. 그래서일까. 요즘 점점 더 식탁에서의 대화가 뜸하다. 아침 식탁은 별다른 대화 없이 숟가락질 소리만으로 채워지고, 가족들이 흩어져 나가고 나면 허무감이 밀려들곤 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부턴지 혼자인 듯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문득문득 빠져드는 우울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그건 아이들로부터 여유가 생기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쓸쓸함이 어느덧 오랜 친구처럼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가끔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을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무조건 외출을 한다. 어쩌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나의 생활 태도 때문일 것이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아 무작정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기웃거려 보기도 한다. 그래 봤자 별다를 것은 없다. 어느 땐 다음 날 당장 후회할지라도 과한 쇼핑을 하곤 한다. 이 모두가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으니 누구로부터 이해받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들이다.
오늘은 문득 영화를 보고 싶었다. 비록 혼자 가는 영화관이지만 최대한 단정하게 차려입고 화장도 정성껏 했다. 아끼는 샤넬 넘버 5도 한 방울 뿌렸다. 많은 향수 중에 이 향수는 특별히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만 사용한다. 오늘만큼은 나를 위한 시간으로 제대로 뽐내고 싶었다. 더는 우울한 감정 따윈 내게 없는 듯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충만했다. 그렇게 난 혼자여도 당당하게, 달콤한 팝콘과 진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도연과 공유가 주연한 「남과 여」라는 영화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해 가는 이야기다. 둘 다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녀가 있고, 그 자녀들이 핀란드의 같은 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의 캠프에 따라갔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폭설에 갇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산책하다 우연히 사우나를 발견하여 그곳에 들어가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벗어버리고 싶으나 차마 벗어던질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두 사람의 일탈의 순간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의무만을 요구당하는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잠시나마 해방한 것은 무한히 펼쳐진 하얀 설원이었다. 해방의 공간인 하얀 설원은 무채색으로 그대로 원시적 자연의 세계를 돌려주는 듯했다.
영화의 어떤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 집중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여인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훌쩍거렸다. 나보다 더 깊이 빠져든 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남자와 여자는 현실이라는 제약을 조금씩 넘나들며 미묘한 관계를 이어간다. 처음에는 남자가 뜨겁게 달아올라 적극적이고 여자는 겁을 먹은 듯 미온적이다. 그러다 점차로 남자가 주춤거리고 여자는 뒤늦게 달아오른다. 급기야 여자 주인공은 호텔 방에서 남자를 기다리고 호텔 방문 앞까지 찾아온 남자는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서고 만다. 여자의 쓸쓸한 뒷모습이 중복되면서 영화는 끝났다. 극장 안의 실내등이 하나둘 켜졌다. 관객들은 마치 밀린 숙제를 마친 듯 덤덤하게 자리를 털고 나갔다. 심하게 훌쩍거리던 여인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둘러 빠져나갔다. 전형적인 아줌마의 펑퍼짐한 뒷모습이었다.
나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관객이 다 나갔는데도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분명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 파장과 여운은 내 안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요사이 부쩍 외로움을 많이 느끼던 터였다. 나도 한번 로맨틱한 사랑을 찾아 떠나봐? 막연한 상상은 감미로우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상상만이라는 한계에 대한 비감과 상상이라는 자유로움의 무 한계성에 대한 매혹이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 모두가 빠져나가고 커다란 비닐봉지를 든 미화원 아주머니가 객석을 치우려고 들어섰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일어나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극장 밖으로 나서자 건너편 건물의 유리 벽에 저녁놀이 찬란하게 비쳐 들었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빛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의 욕망과 나의 자유.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운 죄가 되는 일탈의 꿈. 그런데도 그마저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혼자 갈팡질팡,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제법 많이 걸은 것 같다.
슬슬 배가 고팠다. 식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눈에 띄는 약간 허름한 분식집으로 들어섰다. 김밥 한 줄과 갈비 만두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제야 현실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로맨틱한 사랑의 캐릭터와는 정말로 안 어울리는 식욕, 어쩔 수 없는 아줌마의 식욕에 헛웃음이 나왔다.
벌떡 일어나 집 근처 마트로 향했다. 양손 가득 아침 먹을거리를 사 들고 씩씩하게 집으로 달려왔다. 그랬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때때로 밉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고마운 남편과 나의 분신처럼 여기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었다. 비록 내일 다시 혼자의 시간으로 채워질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