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

그 노을에 반하고 말았다

by 이엔에프제이


지난 6월 여수 바닷가 어느 펜션에서 모임이 있었다. 솔직히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왕 가는 거라면 기필코 노을이 물든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속도로 주변 길가에는 하얀 밤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창문을 내리자 꽃향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마치 내가 느끼는 쓸쓸함의 깊이만큼 멀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바심이 났다. 터질 거 같은 답답함도 밀려왔다.

오후 5시를 훌쩍 지나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듯했다. 그런데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화로운 시골 풍경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비가 왔는지 거리는 온통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풋풋한 풀 내음의 향기가 깔린 길을 따라 한참을 돌고 돌다 보니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아, 드디어 바다다. 그렇게 꼭꼭 숨어 있던 바다를 향해 나는 마치 연인에게 하듯이 괜한 투정을 부렸다.

먼저 도착한 지인들에게 인사를 한 후, 숙소 앞바다에 펼쳐진 아름다운 전경과 상상을 뛰어넘는 이국적인 주변 경치를 보고 순식간에 반해버렸다.

준비한 바비큐와 각자 한 가지씩 챙겨 온 음식을 펼쳐 놓으니, 마치 소풍을 나온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더 늦기 전에 산책길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잔뜩 쌓인 설거짓거리가 시야에서 떠나질 않았다. 당연한 것처럼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내가 지겹도록 싫었다. 창문 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인 붉은 노을이 손짓하는데도 시간은 똑딱똑딱 야속하게 흘러만 갔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면 노을은 깊은 숙면의 시간에 빠져 버릴 텐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노을이 지기 전에 모두 저녁 산책하러 나갑시다."

“아, 근데 설거지해야 하는데요.”

“지금 당장 설거지 안 해도 이따 할 사람 많으니까 빨리 나와요.”

“정말요? 그럼 잠깐만요.”

누군가 먼저 건네주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내어 빠른 걸음으로 숙소를 빠져나왔다. 왠지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해안도로로 연결된 산책로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바다 옆 절벽같이 가파른 언덕 위에서 우아하게 펼쳐지는 불빛은 마치 지중해의 어느 마을을 보는 듯했다.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철썩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저 멀리 선착장 끝자락에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고요한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초저녁의 화려한 노을은 아닐지라도 마치 나를 위해 남겨 놓은 듯한 마지막 붉은 노을이 찬란하게 빛났다. 실로 오랜만에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과 함께 잠잠히 머물고 싶었다.

어느새 수평선 위의 짧고 강렬했던 노을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가슴 깊은 곳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어느새 내 삶의 한 편에 익숙한 채 머물렀던 단단한 응어리가 녹아지는 거 같았다. 인간관계 속에서 힘들게 감당해야만 했던 문제들, 완벽주의적 성향을 버리지 못한 까닭에 자신을 향한 무언의 압박, 그리고 끝없이 바라기만 하는 주변의 눈빛 등등. 그렇게 비우고 또 비워야 남은 삶의 시간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얼마만큼 걸었을까. 선착장에 있는 작은 배 두 척의 모습이 검은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지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져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고요함도 깊어지는 밤바다와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잠잠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 얼마 만이던가 이 자유로움이. 그렇게 나도 모르게 흠뻑 취한 듯 빠져들었던 그날 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끔 스산한 마음이 올라올 때면 유독 그 바다가 그립다. 살다가 불현듯 집을 나서고 싶어지면 무작정 차를 몰고 다녀올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