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해 질 녘이면 나는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곤 한다. 때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이미 마음은 반포대교 밑 무지개 분수 아래가 있다. 벌써 몇 년째 한강의 물결 따라 저녁 산책을 즐기는 중이다. 강물과 어우러지는 환상의 불빛을 보면서 나의 출렁이는 외로움의 전율은 그렇게 또 안정을 찾는 듯하다. 혼자여도 참 좋다. 어쩌다 우연히 지인이라도 만나는 날엔 운수가 좋은 날이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우산을 접고 잠수교 위를 걷는 낙을 느끼고 싶었다. 나의 시선은 강 중심에 두고 터벅터벅 걸었다. 공허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가벼워진 발걸음이 잠수교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맞은편에서 왠지 나와 같은 생각, 같은 느낌에 충실할 것만 같은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만나기 힘든 시간이었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늘 혼자이던 산책길에 오래간만에 동행자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남달랐다.
뜻밖의 만남이 마주친 곳에선 때마침 무지개 분수가 가동되어 분수 동굴이 타원형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굴 안에 갇힌 느낌인데 오히려 황홀하기까지 하다니. 뭔가 특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지개 불빛을 머금은 빗방울이 강물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땐 마음이 편안해지며 분수에 맞춰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을 땐 갇혀 있던 마음이 생기를 찾은 듯했다.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글의 구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땐 강변을 걸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런데 그 작가 또한 나와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면서 가끔 시간을 내어 함께 산책하는 것을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한 후 산책 중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시간을 통해 그 작가와 난 닮은 점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어디론가 목적 없이 떠나고 싶은 것도, 버스나 기차여행을 하며 사색하는 것도, 뚜벅뚜벅 혼자 걷기를 좋아하는 것 등등. 사사로운 것들까지 예사롭지 않게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디 그뿐일까 소소한 일상의 모든 이야기에서부터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웃음 코드가 잘 맞아서인지 지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상대방의 말씨가 내 안에 들어와 함께 공유하는 어떤 친밀함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혹여 지금까지의 상황들이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는 착각을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왠지 필연일 것만 같은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가와는 필시 운명 같은 인연이라도 되는 걸까. 나는 혼자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 후론 그 작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동지가 되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같은 편을 만난 듯 편안했다.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 같고, 어떤 슬럼프가 오더라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도록 잠잠히 곁에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동지인 것이다.
때론 거창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하나의 문학작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철학적 사유를 함께 나누곤 했다. 간혹 의견이 분분하여 생각이 대립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결국엔 내 의견을 더 존중해 주던 참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만남으로 인해 내가 속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따금 몸서리치게 외로움을 느끼던 시간도 현저하게 줄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특효약은 아마도 없을 듯싶다. 단조로웠던 일상이 함께 걷는 발걸음만으로도 마음이 부유해지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급해야 하던 조급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 짐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나는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대화의 갈증에 목말라했는지 모른다. 사방이 가로막혀 어느 한 곳에 마음 둘 곳 없는 작은 물고기가 새 물 새 강가를 만났을 때 살아내기 위한 퍼덕거린 몸부림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 친숙함이 든다. 언제부턴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화의 코드가 맞은 사람을 만났을 땐 평범한 일상에 생기가 도는 듯 삶도 업그레이드된 기분이 들곤 한다. 말하자면 언어의 창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질 땐 그야말로 살아 있는 언어의 능변가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종종 있다.
세상에 사람이 참 많다지만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어도 좋다. 기왕이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을 듯싶다. 서로 비난하지 않고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여 공감하고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 중의 하나 이리.
그해 겨울,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겨울 바다 한가운데서 하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정하게 걷고 있는 두 그림자를 보았다. 행여 파도에 묻혀 그림자가 사라질까 싶어 가만히 지켜보는 나의 등 뒤로 경포대의 따듯한 겨울 햇살이 뒤에서 포옹하듯 사랑스럽게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