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통째로 도둑맞은 허탈함
나는 아주 가끔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를 테면 마음이 울적하거나 쓸쓸함이 몸의 신호를 통해 전해진 그런 날이다.
어디든 가고 싶었다. 누구든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친구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요사이 부쩍 올라온 울적함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껏 화장을 했으니 거기에 맞춰 좀 괜찮은 옷을 입고 싶었다. 그런데 옷장을 열어 몇 번을 뒤져봐도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차라리 약속을 취소하고 싶을 만큼 침울했다. 차마 그동안 쌓아 온 인간관계를 깨고 싶진 않아 그나마 가장 여성스러워 보인 옷을 골라 예쁘게 차려입고 좀 일찍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간은 오후 6시.
카페에 들어서자 진한 커피 향과 어우러진 잔잔한 배경 음악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일부러 따로 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채 먼저 도착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차분하게 책을 읽으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는 것 같아 먼저 진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여 마셨다. 커피를 한 잔 더 리필해서 마셨는데도 친구는 오지 않았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약속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닌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니었는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여러 상황을 유추하느라 내 머리에선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슬슬 약이 올랐지만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그래야 큰소리치며 따져 물을 수 있을 테니.
어느덧 시간은 두 시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카페 안의 사람들도 몇 번씩 교체된 것 같다. 마침내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렀다. 짜증이 나고 배도 고팠다. 그런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미움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렇게 내 마음은 뒤죽박죽 엉망인데 무심하게도 창 밖엔 어둠이 빠른 속도로 짙게 내려앉았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뜸했다. 나는 주인의 눈치가 보여 긴 기다림을 접고 테이블 위에 늘여 놓았던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겨 카페를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무시를 당한 거 같아 이해는커녕 점점 더 화가 차 올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는 그 친구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 친구와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내 마음에서 마침표를 찍기 직전이었다. 거짓말처럼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전화벨이 그제야 울렸다.
“미안해. 사실 어젯밤에 부부싸움을 심각할 정도로 크게 했었거든.”
“그랬구나. 알겠어.”
짧은 통화가 끝났다. 그래서 약속이 있었던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했다. 어젯밤 차라리 세상과 이별하고 싶었다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허탈했다.
어쩌면 모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나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아쉬움이 더 컸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서로를 너무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 전날 약속시간을 확인만 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바람맞진 않았을 텐데. 어쨌든 하루를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