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멤버

나 처음인데 괜찮을까

by 이엔에프제이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있는 가을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지? 아무 때나 베트남 한 번 놀러 와. 내가 안내해 줄게.”

“정말? 그렇다면 당장 친구들 소집해서 자유여행으로 가도록 할게.”

남편이 베트남으로 해외 근무를 가게 되어 함께 따라갔던 순이가 많이 외로운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모임을 만들어 여행도 하고 위로도 해주고 싶었다. 내친김에 친구들에게 전체 공지를 했다.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의견을 보내왔다. 그녀들(정, 옥, 임)은 그렇게 시작된 나의 여행 멤버들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서로를 위한 안성맞춤의 기쁨조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로 편안했다. 때때로 그녀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오랫동안 단단하게 쌓였던 묵은 체증도 단번에 해결되는 것 같기도 했다.


2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가기로 결정을 한 후, 첫 번째 여행지는 베트남이었다. 그 해 겨울, 출발하는 날은 유난히 추웠다. 저 멀리 남쪽 끝자락에서 태어난 그녀들이 해외 첫 여행으로 합류한 탓이었을까. 인천공항 출국장은 평소보다 많은 여행객들로 붐볐던 것 같다. 설렘을 한가득 담은 여행가방을 끌고 나름 공항 패션으로 폼 나게 차려입고 나타난 그녀들을 한 명 한 명 마주하는 순간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볼수록 웃겼다. 그녀들의 들떠있는 표정들 사이로 언뜻언뜻 긴장된 모습을 볼 때 나의 책임감은 더 무겁게 다가왔다.

출국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면세점 구경에 나선 그녀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첫 해외여행 기념으로 특별 보너스를 많이 받았다면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선물을 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여행에 관한 모든 것을 내게 맡겼으니 자유로움 속에서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흔적들이 솔직히 부러웠다. 겉으론 자신 있는 척했으나 나의 머릿속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민해졌고, 마음이 불안하여 비행기 안에서도 편히 쉬질 못했다. 마침내 마중 나온 친구를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은 듯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자마자 호텔로 갈 거라는 생각에 힘이 났다. 빨리 가서 뽀송뽀송 한 이불로 덮여있는 새하얀 침대 위에 벌러덩 눕고 싶었다. 덕분에 긴장이 잔뜩 배어 있던 무거운 어깨도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게 모르게 누적된 여행 피로도 오성 급 호텔에서의 쉼만으로 완벽하게 해결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택시는 약간 허름한 동네로 진입하고 있었다. 뭔 가 불길했다. 나의 쉼의 상상은 현실에서 점점 멀어졌고, 그마저도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순이네 집이었다. 내색을 안 했지만 조금 난감했다.

네 명의 여자들이 합숙훈련(?)하는 장소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5일간의 일정 내내 우리가 사용해야 할 숙소이기에 한 시간이라도 빨리 적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때 하지 못했던 졸업여행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친구들끼리 외국에서 그 또한 새로운 경험이 아니던가. 한 이불속에 다 같이 드러누워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야말로 과거로 순간 이동하여 딱 그 시절, 그 수준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들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다음날, 순이의 안내를 받아 피로도 풀 겸 전신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남자 마사지사들이라는 말에 솔깃하여 은근히 기대되었다. 그동안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도 한 번도 남자 마사지사한테 마사지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이 되면서 약간 떨렸다. 남편들한테는 절대 비밀,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용기를 내어 마음을 모았다. 단체로 들어가는 방에서 다섯 명이 순서대로 침대에 누웠다. 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느닷없이 한 친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난 도저히 못 받겠어. 그냥 여자 마사지사로 할래.”

“나도 나도. 마사지받다가 왠지 두근거린 심장소리를 들켜버릴 것 같아.”

“하여튼 촌스럽기는. 아무렇지 않아. 이럴 때 한 번 받아 봐야지 언제 받아보니? 진짜 잘하거든.”

“순이 말대로 우리 다 같이 받아 보자. 혼자는 부끄러워서 절대 못 받을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나 봐. 그냥 저기….”

갈팡질팡 의견이 분분해서 결국 그 묵직한 손끝의 기대는 물거품 되었고, 모두 여자 마사지사로 체인지되었다. 아닌 척해도 나를 포함하여 몇 사람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린 마치 현지인이라도 되는 양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엔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사는 게 자연스러웠다. 마지막 날 밤이었다. 작은 파티를 하기 위해 준비한 간단한 음식들을 식탁에 펼쳐놓았다. 식탁 중앙에서 향기를 풍기며 타오르는 촛불 하나에 시선은 고정되었고, 와인 한 잔씩을 곁들이니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한 친구가 먼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담을 꺼냈다. 그 당시 따돌림당했던 순간을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왠지 목소리에선 간간이 떨림이 묻어나곤 했다. 학교를 졸업한 지 수 십 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 이난 모양이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죄인인 것 같아 미안했다. 손을 내밀어 화해를 하고 심심한 위로를 하는 사이 파티장의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누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에피소드를 꺼내올 땐 나이 들어 감을 격하게 공감하며 맞장구를 치곤 했다. 우린 그렇게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박장대소하며 마치 고향에서 만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 통쾌한 웃음소리는 어떤 보약보다 더 큰 에너지원이 되는 것 같았다. 비록 호텔에서의 편안함과 안락함은 누리지 못했어도 꾸밈없는 그녀들과 함께 한 공간 안에 머무름만으로도 오감이 만족스러웠다.


난 여행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국내든 국외든 매번 여행을 할 때마다 여행 멤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곤 한다. 그녀들은 어쩌면 가족보다 더 재미난 구성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나만 믿고 따라온 그녀들을 안전하게 귀국시켜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탑승게이트 위치를 확인한 후, 우린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거의 보딩 시간에 맞춰 탑승 게이트 앞으로 갔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계속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녀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그냥 무시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여 귀를 쫑긋 세우고 다시 집중해서 들어보았다. 제기랄, 우리가 탑승해야 할 게이트가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얘들아, 여기 아니래. 빨리 뛰어. 비행기 곧 출발이래.”

“너만 믿고 왔는데 하마터면 짐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우린 국제 미아 될 뻔했잖아.”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고 가까스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착륙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익숙한 그곳, 서울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우리, 2년 후엔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