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충분한걸
까짓것 좀 아프면 어때
구월의 어느 날
얄미운 불청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어
평온한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억울함에 대한 위로랄까
삶이 익어가는 과정의 일부인 것을 인정하는 차원이랄까
더 깊어질 신음과 마주해야 할 자신감 상실이랄까
몰라 모르겠어, 그렇게 난
열한 시간 사십 분 동안
하늘의 감금 상태였어
안경을 바꿔
시집 한 권을 읽었어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데
고요한 틈새에 스멀스멀 신호를 보내는 거야
통증을 재우려고 눈을 감았지
잠들지 못한 시간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한숨으로 채워지고
아침인 듯하여 창문을 열었더니 아직도
바다 위 구름 동산을 지나는 중인가 봐
가끔 난기류를 만날 때마다
긴장한 세포는 불안을 불러오고
하는 일도 없는데
주는 밥을 또 먹었어
배가 부르니 감성까지 충만해진 듯
시작 노트를 끄적거렸지
집중이 되지 않은 걸 보니
생각의 길이 막힌 모양이야
홀쭉해진 마음의 태도가 안쓰러웠어
지름신이 강림하던 그때가 그리워질 줄 몰랐어
유독 강한 자기애가 다시 살아나는 날
별거 아닌 인생이 마음 놓고 웃게 되는 날
올까, 그날이
미세한 통증까지 삼켜버릴 설렘이 머문 곳
공항을 빠져나온 캐리어 바퀴의 행복한 비명
까짓것 좀 아프면 어때, 나는 나로 충분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