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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엔에프제이 Mar 25. 2020

손님

4인 식탁으로의 초대를 받다



  여행 중이었다. 나는 까만 밤, 까만 파도 소리가 철썩철썩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가 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절벽에 부딪힌 잔잔한 파고에 가슴이 콩닥거려 가던 길을 멈췄. 어둠을 가로질러 밤새 동반자가 되어 주던 하얀 가로등이 어찌  영문인지 많이 지쳐 보였다. 왠지 누군가를 닮은 사람이  것만 같아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로등 주변을 서성거렸다.

  모처럼 이른 저녁을 먹어서인지 하루를 마감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할까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해변 산책하러 나갔다. 혼자여도 참 좋은 시간이란 걸 느끼고 있는데, 숙소에서 쉬겠다던 나희가 어느새 뒤따라와 숨을 헐레벌떡 쉬며 어깨를 툭 쳤다. 오래간만에 데이트하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학 때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나희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감정표현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을 넘긴 나희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게 날카로웠다.

  나희는 동아리 선배와 결혼했는데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했다. 둘만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며 충분히 서로의 삶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전문 직업을 가진 나희 부부는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생길 때마다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단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부부가 같이 다니기도 하지만 각자의 취향을 고려하여 혼자 다닐 때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희의 여행길에 오래간만에 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이박삼일 간의 짧은 여행이지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즐기기로 했다.

  야무지게 세운 옷깃 사이로 늦가을 밤바람이 기어이 파고들었다. 좀 싸늘한 기운 탓인가 해변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찬바람의 공기가 마치 첫사랑의 그때를 소환하는 거 같아 가로등 불빛이 사라지는 곳, 거기까지만 걷기로 했다. 그런데 어둠이 깔린 맞은편에서 언뜻 보아도 체격이 엄청나게 커 보이는 두 사람이 거칠게 걸어오고 있었다. 겁을 먹은 나희가 나에게 바짝 붙어서 팔짱을 끼었다. 그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때야 나희의 표정이 불안에서 벗어난 듯 조금 안정돼 보였다. 다행히 같은 숙소에 묵고 있어 오가는 길에 몇 번은 보았던 터라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묻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관계는 직장 동료 사이라고 먼저 말해주었다.   

  다음 날 저녁, 우연히 4인 식탁으로의 초대를 받았다. 어젯밤 해변에서 의도치 않게 불안을 조성한 것 같아 괜한 오해를 풀고 싶다는 이유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은 뭔지 모를 공통적인 끌림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나희와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식사도 하면서 라이브 공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좋은 카페였다. 카페 안은 다양한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라이브 공연은 벌써 진행 중이었다. 나희는 창가 옆 밖이 훤히 잘 보이는 쪽 의자에 앉았다. 네 사람이 마주한 식탁은 그야말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맛깔스러운 감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나쁘지 않았다. 나희는 시간이 흐를수록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고 했다. 그러더니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과 눈이 마주친 후, 시선을 피해 보아도 한동안 생각나지 않던 첫사랑이 겹치어 나타남을 조금 의아해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 나희는 약간 혼란스러운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때의 순간들이 더욱 또렷하게 가동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나희의 기억 속에 무심한 듯 살고 있었을 첫사랑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뜻밖에 소식을 전해 온 것 같아 미치도록 보고 싶단 생각이 지워지지 않은 듯했다.   

  나희는 남자를 볼 때 다른 외모는 보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조차 단번에 녹일 수 있는 따듯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온 저음 톤의 정확한 발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조금 시끄러운 상황인데도 귓가를 자극하는 게 낯설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희는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쩌다 웃음 뒤에 살짝 여운을 남기는 소리까지 첫사랑을 닮아도 너무나 정확하게 닮아 순간순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던 나희의 눈빛은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상대방의 눈빛이 먼저 나희의 마음을 끌어들였다. 번개보다 빠른 따듯한 시선이 나희의 잠잠하던 심장을 관통하기까지는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혼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희는 가을이 오면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어쩌면 타고난 운명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려니 하며 외로움과 함께 살아온 지도 꽤 오래되어 별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듯 마음은 여전히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도록 아파했다.

  그나저나 올가을은 또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는 아직 다하지 못한 숙제처럼 늘 꼬리표를 달고 나희의 삶 가운데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신을 차리려야 한다며 잠깐 바람 좀 쐬러 나갔다 오겠다던 나희는 한 시간이 지나도 카페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틈에 따라나섰는지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다.

  밤이 깊어진 늦은 시간, 카페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지막이 카페로 들어온 두 사람 사이에 숨길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나희 옆에 살포시 따라왔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행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아 보였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나희는 고요한 어둠이 까맣게 깔린 그 길을 잠시 다시 걷고 싶다고 했다. 나희의 표정이 약간 긴장된 듯 어색한 기류를 몰고 왔다.  

  나희에게 찾아온 손님으로서의 남다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척 의미가 있던 그날의 기억은 이따금 무질서하게 흩어진 나희의 일상에 큰 힘이 되곤 했다.

  사실 결혼 7년째 접어든 나희 부부는 서로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섹스 리스로 살고 있었다. 그렇게 방심한 사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신뢰하자던 약속마저 어느 순간 떠나 버렸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끝에 머물러 있을 때, 속이 메스꺼움을 느낀 나희는 소화제를 사러 집 앞 약국에 갔다. 그런데 약사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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