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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Dec 12. 2021

너에게 가는 길

2년 정도 걸렸다고 했다. 아들이 쓴 장문의 커밍아웃 편지를 받은 엄마는 충격 속에서도 일단 괜찮다고는 했지만, 게이 아들을 실제로 받아들이는데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아들을 대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아들 이야기를 할 때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남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여성의 몸으로 성장하는 이질감이 싫어 불을 끄고 샤워를 했던, 죽고 싶어도 여성으로 죽는 것이 싫어 죽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엄마는 아이의 가슴과 자궁 제거 수술을 선택하고 아이와 함께 18개나 되는 서류를 구비하여 법원에 호소했음에도 성별 정정 신청은 기각되었다. 외형상 남성 성기를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엄마들이 아이커밍아웃을 계기로 들에게 점차 다가가는 이야기를 은 다큐멘터리다. 게이 아들 엄마는 같이 집에 온 아들의 남자 애인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레즈비언 아이 엄마가 지방 법원으로 돌려 신청한 성별 정정 신청이 끝내 받아들여지지만,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상처 없이 행복하게 기에는 갈 길이 한참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참여했던 합법적 퀴어 문화 축제가 동성애 반대자들이 몰려와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폭력에 부딪혀 무산되고, 성전환 수험생이 여대 학생들의 반대로 입학을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기사를 본 아이는 먹던 우울증 약을 늘린다. 이런 상황이 부모들을 점점 투사로 만들지만 아이들과 같이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치열하게 편견과 싸우며 믿음과 연대 속에 당당한 부모들의 모습을 한 명씩 비추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최근 본 영화 중에 소수자의 삶을 다룬 영화가 하나 더 있다. '피부를 판 남자'라는 특이한 제목의 영화. 우여곡절 끝에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 샘 알리는 레바논의 한 미술관에서 몰래 공짜 음식을 먹다가 이름난 예술가에게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의 등 전체에 타투를 새기고 앞으로 자신의 전시회 투어에 동행하는 대가로 샘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벨기에를 포함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여권을 만들어주겠다고. 샘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는 샘의 등에 타투를 새긴다. 아이러니하게도 등에 새겨진 타투는 바로 난민들이 그토록 고 싶어 하는 유럽지역 입국 비자인 쉥겐 비자 모양.

그는 내전과 구금, 생명의 위협을 벗어나 특급 호텔에서 캐비어를 먹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전시회장에 놓인 의자에 상체를 벗고 조각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했다. 관람자와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원치 않는 포즈도 취해야 다. 이름이 알려지며 시리아 난민 단체의 시위 대상이 되고 심지어 품으로 거래되며 경매 대상으로도 오르게 된다.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며 재미를 더하지만, 자유를 찾았으나 오히려 존엄성과는 거리가 멀어진 어쩔 수 없는 난민의 삶이라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태어나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것이 있다. 성별이나 인종, 국적 같은 것.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래서 들은 소수자의 삶을 선택한다. 권력이나 부를 마음껏 누리는 소수의 사람들은 절대 소수자로 불리지 않는다. 성소수자나 장애인, 난민처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를 제대로 갖지 못하고 차별에 시달리는 이들이 주로 소수자라 불린다. 미성숙한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과 정의라는 잣대에서조차 그들을 배제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질문 빈곤 사회'라는 책에서 저자 강남순 교수는 '우리는 이웃을 환대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1992년에 이미 WHO에서 다양한 성적 지향을 인간 섹슈얼리티의 정상적 형태로 인정한 마당인데도, 동성애를 찬성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직도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찬반을 논한다는 점에서 나쁜 질문이다. 태양 아래 소속된 세계 시민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난민을 숫자가 아닌 개별적 얼굴을 지닌 존재로 환대하는 것, 모든 인간을 행복할 권리를 가진 존재로 배려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와 책임이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마지막에 성소수자 부모들이 행진하며 들고 있던 피켓에 쓰여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틀림이다." 요즘 MBTI 얘기를 흔히 하는데, 물어보면 자기 유형은 대개 알고 있다. 우리는 상대가 INTP이건 ESFJ이건 그런 것은 개인적 특성으로 차별 없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가끔 우리도 모르게 특정한 이들에게 차별의 시선을 던진다. 섣불리 틀리다는 판단을 내리기 보다 우선 다름으로 인정하고 접근하면 많은 주위의 일들이 좀더 편안하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의 많은 너에게 가는 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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