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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Oct 12. 2021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_ 림태주 에세이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추석이 막 지나 출간된 림태주 시인의 새 에세이 제목이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곳이거나 공감이 가는 문장에 우리는 밑줄을 긋는다. 윗줄이 아니라 밑줄, 그리고 글이 아니라 말에 긋는다면, 상대의 말에 긋는 밑줄에는 그만큼 당신의 말을 받치며 존중한다는 뜻이 더해진다.


말에 밑줄을 긋는다면 무슨 색으로 그을까? 시인은 모든 색에 딸린 명도와 채도처럼, 모든 말과 마음에 깃들어 있는 명도와 채도를 이야기한다. 말에 진정성과 믿음을 담아 관심과 사랑을 전하며, '가슴어'로 대화하고 서로의 '은어'가 만들어질 때 서로 나누는 말은 명도가 높은 밝은 말이 된다.

시인의 전작 에세이 제목은 '관계의 물리학'이다. 물리학의 핵심 주제는 '운동'이라서, 두 물체가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에서 거리, 질량과 속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뽑아내어 존재의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확장시켰다면, 이번 에세이에서 시인은 물리학에서 화학으로 눈을 돌렸다. 화학의 핵심 주제는 '섞임'이라서, 당신과 내가 서로 싸우고 파고흔들리며 발효되고 숙성하는, 연금술 같은 돌이킬 수 없는 화학적 변화 일으키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시인이 하는 화학에서 섞임은 급하지 않다. 지켜보며 조금 머뭇거리고 조심스럽게 연민하는 마음,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 더하기보다는 빼는, 그러나 상대방을 밝히고 지켜주는 줏대 있는 언어의 화학이다. 색은 섞일수록 채도가 낮아진다. 시인의 글 역시 그렇다. 섣불리 무엇이라 강조하기보다, 낮은 곳으로 흐르며 조용히 마음에 스며드는 글이다.

시인은 책의 첫머리에서 장작불로 정성을 다해 뼈를 고아낸 곰탕에 대해 언급하고, 책의 말미에는 족발의 뼈 위에 켜켜이 쌓인 살코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이 시인이 그동안 지해온 관계에 대한 오랜 생각을 뽀얀 국물로 우려내고 언어살코기를 잘 썰어 넣어 차린 정성스러운 밥상이란 느낌이 들었다. 시인이 그동안 온갖 사물들, 매화나무와 수국, 채소나 별과 물고기, 바다 등과 주고받은 많은 말들은 반찬으로 놓여있다.

책을 읽으며  역시 많은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아끼는 자존을 가지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만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밑줄을 그으며 여러 번 떠올랐다. 그의 말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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