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번에 내가 먹고 싶다 했던 오이소박이를 장모님이 마침 만드셨다고 집에 오는 길에 가져오라고 했다. 주말에 가면 될 텐데 뭐 밤늦게 까지, 생각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하고 퇴근길에 차를 몰아 처갓집 쪽으로 향했다. 길 건너편에 장모님이 쇼핑백을 들고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바로 유턴을 했는데 급히 돌다 보니 차 앞부분이 인도 턱과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한번 후진할까 하다가 괜찮겠지 하고 그냥 돌았더니 뭔가 드득 걸리면서 차체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기분이 좀 싸했지만 장모님도 계시고 해서 일단 오이소박이를 받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핸드폰 라이트로 비춰보았다. 앞 범퍼 오른쪽 아랫부분이 심상찮다. 손으로 문지르니 꺼끌꺼끌하고 시멘트 가루가 묻어나는 것이 분명 인도 턱 위에 잠시 다녀온 흔적이다. 컴파운드로 급히 닦아도 소용없었는데 그나마 차 밑이라 표가 잘 나지 않는 것만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옷소매에 컴파운드도 조금 묻어있었는데, 순간 그러게 왜 그 밤중에 나를 거기까지 가게 했냐는 말이 턱까지 잠시 올라왔다 내려갔다. 그래 그게 어찌 아내 잘못인가, 조심하지 않은 내 탓이지.
다음 날 오후, 외부 일정이 있는데 생각보다 조금 출발이 늦었다.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경사를 돌고 돌아 올라오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차가 있었다. 좀 큰 차라서 조심한다고 핸들을 틀어 옆으로 조금 붙였더니 앞 타이어 쪽에서 부욱하는 소리가 나며 차가 퉁 튀는 느낌이 들었다. 불길한 기분으로 올라와 멈춰놓고 보니 타이어와 휠 일부가 주차장 턱에 허옇게 긁혔다. 역시 표는 별로 나지 않았지만 스크래치가 생기니 마음도 스크래치다. 어제는 조심스럽지 못하게 돌다가 그랬는데, 또 오늘은 조심한다고 피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 그거 노화 현상이라 감각이 둔해져 그렇단다. 정말 그럴까? 운전 초보 시절 나는 기둥이나 턱 같은 곳을 잘 긁고 다니는 편이었다. 기분은 상해도 ‘뭐 그렇다고 달리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하며 차량용 붓펜으로 대충 칠하고 잘 다녔다. 뭔가 새롭게 배울 때 생기는 작은 흠집들은 일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잔실수를 반복하며 조심하다 보면 큰 실수를 피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제 운전한 지 30년 다 된 지금 와서 차를 긁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마 어떤 일이든 과신하거나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려나.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거나 뭔가 급하게 이루려 말고 차분히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삶이 나에게 전달하는가 보다.
초보이거나 베테랑이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살면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은 다 나름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 삶은 돌이킬 수는 없지만 돌이켜볼 수는 있다. 가끔 이렇게 작은 흠집을 내는 일들이 있지만 그래도 오이소박이는 맛있게 먹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한번 돌이켜보게 되니 그게 흠집의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