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기가 무성한 커다란 수사자 한 마리가 내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온다. 달려들지는 않는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응시한 채 쫓아오고 있다.
어제 이곳 원주민이 슬쩍 귀띔해준 말이 떠올랐다. 여기 서식하는 사자는 달리는 사람은 절대 공격하지 않지만, 멈추는 순간에 달려든다고 했다. 그러니 혹시라도 사자를 발견하면 느리더라도 계속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숨이 점점 가빠왔지만 사자 때문에 멈추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자의 한 끼 식사로 내 삶을 마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곳은 아프리카의 초원이 아니다. 한강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다. 산책로에 웬 사자냐고? 그럴 이유가 있다. 5km 거리도 헐떡이며 겨우 뛰는 내가 다음 달에 열리는 10km 마라톤 대회에 덜컥 등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완주를 목표로 연습을 하는데 힘들 때마다 자꾸 멈추고 싶어졌다. 그래서 상상 속에 사자 한 마리를 들여놓았다. 사자가 쫓아온다고 생각하니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뛰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일을 갑작스레 벌이게 된 건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 때문이다. 그 책은 저자가 동료들과 함께 5주 일정으로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알래스카 북극 오지를 향해 떠나면서 시작된다. 순록을 사냥하기 위한 여정에서 그들은 추위와 눈폭풍, 굶주림과 곰의 습격 같은 위험을 모두 견뎌야 했다. 과학기술 덕분에 살기 편안해졌지만 사람은 오히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잃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그들은 스스로 불편함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도전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는 과제는 엄청나게 힘들 것, 둘째는 그러나 죽지 않을 것.
"준비 과정에서 15킬로미터 이상 뛰지 못했고, 두어 번 정도 25킬로미터를 뛰어보긴 했지만, 30킬로미터까지 뛸 수 있을까 아주 의심스러운 상황이라면, 목표는 약 40킬로미터가 되는 거죠." (편안함의 습격, p74)
실패 확률이 높은 상황에 과감히 뛰어들어 잠재력을 일깨우라는 메시지에 끌려 10km 마라톤을 찾아 바로 신청해 버렸다(지금 생각하니 하프 마라톤까지 욕심부리지 않은 것이 너무 다행이다). 마사이족 청년은 창 하나로 사자를 사냥하는 통과 의례를 거쳐야 어른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나에게도 사냥으로 먹을 것을 구하고, 위험에 닥치면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며 살아온 선조의 DNA가 있을 것이니 그 정도 달리기는 해도 된다 싶었다. 그러다가 결국에 사자를 한강변까지 불러내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고작 목표의 절반 정도만 사자와 달리고 있지만.
사막 여행을 하다가 모래 폭풍을 만나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니 주변의 길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헤매다 보니 가지고 있던 물도 다 떨어져서 한 이틀 동안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오아시스는커녕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사막이었다. 목이 말라 거의 쓰러질 지경에 저 멀리 사람들이 보였다. 아랍인들로 보이는 그들은 물통을 메고 있었다. 한 모금 얻어 마셔보니 찝찔하고 탄산이 섞인 이상한 맛이었다. 그걸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양해를 구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체로 청량한 기운이 퍼져갔다.
하지만 내가 물을 마시던 곳은 사막이 아니었다. 한밤 중의 우리 집 거실이었다. 대장 내시경을 받기 전날 밤에는 장을 비우기 위해서 대략 3리터 되는 물을 나누어 장정결제를 타서 마셔야 한다 그런데 그 맛이 이온음료에 소금을 탄 듯한 찝찔한 맛이라 마시기에 아주 힘들다. 이것 때문에 검사받기 꺼려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인데, 그럴 때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내가 사막 한가운데서 극한 갈증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러면 마시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힘든 일이라고 했지만 좀 더 극한 상황을 놓고 보면 그 정도는 아닌 일이 된다. 그리고 힘든 상황은 결국 지나가고, 그 경험은 나중에 비슷한 상황을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정신 승리'라는 말에 거부감이 없다. 삶은 누군가 정확히 점수를 매기거나 심판이 손 들어 올려 정해주지 않는다. 인생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잘 살거나 못 살거나 하는 일은 나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출퇴근 길에도 사자가 뒤를 살금살금 쫓아오고, 집에서도 갑자기 사막의 폭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그런 게 삶이다. 어떤 일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삶을 피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뜻이고, 그 불편함을 넘어서는 과정 속에서 작은 진화를 거듭하며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