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수술보다 중요한 본질적 가치가 있다.
D-DAY.
드디어 백내장 수술 예정일이다.
두 달 넘게 우리 가족은 오직 오늘만을 위해 준비해왔다.
매일 일정 시간에 맞춰 여러 종류의 안약을 투여 했고, 햇살이 등에 실시간 혈당 측정기를 부착하여 안약과 내복약 성분으로 인해 튈지 모르는 혈당관리에 집중 했다. 고혈당 방지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는 인슐린 주사까지.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일을 위한 외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차피 수술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다시 회복될 일상이니깐. 햇살이가 다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지난 십 년 동안 우리가 받은 사랑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아무리 답답해도 앞을 못 보는 햇살이에 비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준비해 왔다.
오늘만 지나면 햇살이는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고, 우리 가족의 일상에도 그만큼의 숨통이 트일 것이다.
예약 시간인 12시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아침 사료와 인슐린은 병원에서 권유한 대로 평소의 절반만 줬다. 혈당이 비교적 높게 유지되었지만 병원에선 수술하기엔 저혈당 보단 약간의 고혈당이 낫다고 했다.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수술 가능하다는 최종 진단을 받고 우리는 2층 수술 대기실로 올라갔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간호사는 여러 종류의 안약을 건네며 10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넣으라고 했다. 염증을 억제하는 안약과 스테로이드가 함유된 안약 그리고 동공을 확장시켜 주는 걸로 추정되는 안약. 한쪽 발에는 링거를 계속 투약했다.
대기실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반려견과 보호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첫 번째 수술 시간은 2시로 예상되고 우리는 두 번째 순서라서 3시 이후에 수술이 가능할 거 같다고 했다.
2시가 지났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수술실로 올라오지 않으셨다. 오늘따라 진료 동물들이 많아서 늦어진다고. 결국 첫 번째 수술은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가량 늦게 시작되었고 예정시간보다 길어지는 대기 시간 동안 댕댕이의 혈당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옆에서 기다리는 보호자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인데 점점 높아지는 혈당과 안약으로 인한 눈의 통증 그리고 링거 호스의 길이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대기해야만 하는 햇살이는 얼마나 힘들까. 녀석은 계속해서 헥헥. 낑낑거리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안아주고 다독거리며 수술 시간이 되기까지 함께 기다려 주는 것뿐.
첫 번째 강아지가 수술실로 들어간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원장 선생님이 밝은 표정으로 수술실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기다리던 보호자에게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났음을 알렸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마치 우리 햇살이 수술 결과를 전해 들은 듯 기뻤다.
대기시간 좀 길면 어때. 우리도 저 녀석처럼 수술만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곧이어 간호사가 왔고 햇살이는 간호사의 팔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간다. 멀어져 가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외쳤다.
햇살아 수술 잘 마치고 와. 이제 곧 엄마랑 누나를 예전처럼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힘내자.
수술실로 들어간 지 십 분쯤 지나자 햇살이의 짖는 소리가 들린다. 진료받을 때 한 번도 짖지 않던 녀석인데. 왜 저렇게 짖는 걸까. 어디 잘못된 건 아닐까 걱정하던 우리에게 간호사는 산소방에 강아지를 넣으면 대부분 짖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산소방에 잠시 뒀다가 마취를 한다고. 다른 강아지들도 다 짖는다고.
곧이어 원장 선생님과의 면담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확률상 거의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수의사 선생님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니 너무 걱정 말라고 불안해하는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다. 선생님도 수술하는 내내 성공적으로 끝나길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우리는 다시 대기실 의자로 돌아왔다. 이 병원은 보호자가 수술 과정을 볼 수 있도록 대기실 LCD 화면을 통해 실시간 수술 영상을 제공하고 수술실 내부도 볼 수 있도록 통유리의 투명도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수술을 하지 않을 땐 LCD 화면은 꺼지고 수술실 통유리도 불투명한 흰색이지만, 수술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통유리는 투명하게 바뀌고 LCD 화면로 디테일한 수술 장면을 보여준다.
햇살이가 수술실로 들어간 지 2~30분쯤 지나자 마침내 수술실 통유리가 투명하게 바뀌었고 각종 수술 장비 너머로 간호사들과 원장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LCD 화면에는 댕댕이의 한쪽 눈이 클로즈업되었다.
내가 하는 수술도 아닌데 괜한 긴장감이 밀려온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LCD 화면에 집중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수술일 테고 햇살이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니깐. 그 역사적 순간을 두 눈에 담고 기억하고 싶었다.
수술 순서는 이렇다. 먼저 수술할 눈을 크게 벌려서 기구로 고정한 후 안구를 소독한다. 소독이 완료되면 수정체에 얇고 작은 매스로 작은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을 통해 약물을 주입하면서 오염된 수정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수정체를 투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머니와 동생은 그 장면을 보면 눈물 날 것 같다고 고개를 숙인 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기도했고 나는 계속해서 수술 과정에 집중했다. 30분쯤 지나자 왼쪽 눈 수술이 완료됐고 LCD 화면은 다른 쪽 눈을 비췄다. 오른쪽 눈도 왼쪽 수술과 같은 순서로 눈꺼풀을 고정하고 수정체의 가장자리를 작고 날카로운 매스로 찢었다.
그 순간.
갑자기 LCD 모니터의 화면이 꺼졌다.
응? 무슨 일이지?
곧이어 내부가 훤히 보이던 수술실 통유리창이 불투명한 흰색으로 바뀌었다.
수술실 안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여러 실루엣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급박한 내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수술이 잘못되었나.
수술 중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했는데 설마 그 몇 프로 안 되는 불운이 우리에게 일어난 걸까.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고 뭔가 급박한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 분위기에 어머니와 동생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말자. 별일 아니겠지. 안과 전문으로 아주 유명한 선생님이잖아. 아마도 다른 준비할 일이 있어서 잠시 화면을 끈 걸 거야.
불안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목소리에 힘을 줘 강조했다.
어머니와 동생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내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나는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은 걸까.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수술실 화면이 다시 켜졌다.
하지만 앞서 봤던 수술 과정과 달랐다. 기존의 수정체를 제거해야 하는 순서인데, 찢었던 수정체 가장자리를 꿰매는 장면이 나왔다. 수술을 완료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은데.. 찢었던 부분을 꿰매는 손놀림은 빨랐고 이내 화면이 다시 꺼졌다. 잠시 후 흰가운을 입은 원장 선생님이 대기실로 나오셨다. 선생님의 얼굴은 어두웠고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설마..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건 아니겠지.
선생님 수술은 잘 끝났나요? 어머니가 원장 선생님께 달려가 먼저 물어보셨다.
아. 그게. 수술 중에 갑자기 혈압이 너무 떨어져서 댕댕이가 의식을 잃었어요. 이런 일은 극히 드문데.. 저희도 너무 놀라서 수술을 중단하고 댕댕이 의식을 돌아오게 하느라 진땀 뺐습니다.
그래서.. 햇살이는 무사한가요?
네. 다시 의식을 회복했는데, 수술을 강행하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오른쪽 눈은 일단 포기하고 다시 닫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다시 살아났다니 다행이에요. 눈 뜨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는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잘하셨습니다.
아.. 그래도 수술을 완전히 마치지 못해 너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수술은 나중에 다시 하면 되죠. 선생님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잘 대처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오늘의 수술만을 위해 두 달 넘게 고생한 기억을 감안하면 큰 아쉬움이 남았지만 생사 앞에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다. 백내장 수술 하는 것도 잘 살자고 하는 건데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공하지 못한 한쪽 눈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적어도 지금은 감사해야만 할거 같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햇살이는 간호사의 품에 안겨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 아직 완전히 마취에서 깨지 못한 댕댕이는 축 늘어진 채 어머니에게 안겼다. 나도 모르게 댕댕이의 심장에 손을 댔다. 뛰고 있다. 다행이다.
간호사는 아직 마취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곧 마취가 깨면 일어날 거라고 했다.
축 늘어진 녀석을 보니 수술실 안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미 눈에 눈물이 가득한 어머니와 동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살아줘서 고마워. 너무 고마워. 반복했다.
원장 선생님은 체력 회복에 도움 되는 주사를 햇살이에게 투약하면서 계속해서 미안해하셨고 나는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도 빠르게 판단하고 잘 대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를 반복했다. 그분의 표정과 태도가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당뇨견의 수술 중엔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거니깐. 수술 전에 당뇨견 백내장 수술에 관한 정보와 수술과정을 미리 인터넷을 통해 접했던 나는 원장 선생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래도 우리에게만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했던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컸다. 그래도 어쨌든 살았으니깐. 오른쪽 눈도 수술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오직 그 생각에 집중하자.
간호사는 회복에 필요한 안약과 내복약을 주며 복용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수술 후 관리방법은 훨씬 더 복잡했다. 수술을 마친 한쪽 눈과 그렇지 못한 눈에 투약하는 방법이 다르니깐. 정신이 없어서 그의 설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스마트폰 녹음 버튼을 눌러 그 설명을 녹음했다. 마음이 진정되면 집에 가서 다시 들으며 정리해야지.
수술비를 계산하고 처방받은 약을 챙긴 후 우리는 병원 밖을 나섰다. 밖은 어느덧 깜깜했고 바람은 쌀쌀했다.
자동차로 가득했던 고객 주차장엔 우리 차밖에 없었다.
차에 녀석을 태우고 괜찮은지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녀석은 눈을 반쯤 감은체 앓는 소리를 냈다. 혼자 수술실에서 사경을 헤맸을 녀석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 줘서 대견스럽다.
얼른 회복하자 햇살아. 너도 그 힘든 시간을 버텼는데 우리가 몇 주 더 고생하는 게 무슨 대수겠니.
창문을 열어 선선한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내뱉는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