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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병원 대기실은 작은 커뮤니티 센터

동변상련은 동지애가 되었다.

by 하임

안녕하세요. 누룽지는 좀 괜찮아요?

아 네. 안녕하세요. 밥도 잘 먹고 오늘은 눈도 선명하고 좋아요. 오늘은 조금 늦게 오셨네요.

네. 터널에서 차가 많이 막히더라고요.

아.. 우리 올 때도 좀 막히던데. 햇살이는 좀 괜찮아요?


백내장 수술을 마친 후 거의 매일 병원에 가다 보니 아는 사람들이 꽤 많이 생겼다.

그중에서 누룽지는 햇살이와 같은 날 백내장 수술을 한 강아지다. 수술 대기실에서 원장선생님이 아주 성공적으로 수술이 잘됐다고 했던 그 녀석. 같은 날에 수술한 동기라서 그런지 우리는 매일 병원 대기실에서 마주쳤고 그러다 보니 이젠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

누룽지는 작고 순해 보이는 말티즈다. 항상 보호자로 부부가 함께 오며 주로 아빠의 품에 안겨있는데 크기가 아빠 팔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은 귀여운 녀석이다. 겉모습만 보면 보호자가 주는 거 다 잘 먹고 주사도 잘 맞고 안약도 잘 넣을 거 같은데, 막상 보호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보기와는 다르게 안약과 주사 놓을 때마다 전쟁을 치른다고 한다. 그래서 안약을 넣을 땐 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누룽지가 고개를 들고 있을 때 높은 공중에서 안약이 눈에 들어갈 때까지 떨어뜨린다고. 처음엔 서툴러서 넣는 약보다 버리는 안약이 더 많았는데 이제는 한두 번 만에 꽤 잘 들어간다고. 이 정도면 무림의 고수 수준 아닌가요? 하는 나의 농담에 누룽지 아빠는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네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픈 반려견과 오래 생활하는 보호자들은 이렇게 하나둘씩 재야의 고수가 되어간다. 각자의 방법을 찾지 않으면 케어할 수 없으니깐.


누룽지~ 누룽지~ 보호자님.

우리보다 일찍 온 누룽지가 진료실로 들어간다.

저기 우리 차례는 언젠가요? 누룽지 옆에 앉아있던 보호자가 간호사에게 묻는다.

애기 이름이 뭐예요?

땡초요.

아. 땡초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어요. 앞에 대기 중인 애들이 좀 있어서요.

네.


애 이름이 땡초에요? 보호자 분이 매운 땡초를 많이 좋아하시나 보다. 어머니가 웃으면서 땡초 보호자에게 말을 건넨다.

대기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대기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반려동물 이름에는 재미가 있다.

어디에서 시작된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먹는 음식 이름으로 반려동물 이름을 지으면 오래 산다는 말 때문에 반려동물 이름엔 식재료와 과자 이름이 많다.

땡쵸, 보리, 두부, 누룽지, 찐빵이. 쵸코, 콩이

간호사가 부르는 이름 중에 귀에 익은 이름들이다. 이런 이름이 불리면 습관적으로 이름의 주인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반려견들이 그 이름과 어울리는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다. 두부는 정말 하얗고 탱글탱글하게 생겼고, 쵸코는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짙은 브라운 색, 찐빵이는 의외로 작고 날씬해서 좀 의외긴 했지만.


네. 고추 땡초도 좋아하지만 부르기도 좋고 해서 지었어요. 그쪽 애는 이름이 뭐예요?

햇살이요.

아. 햇살이.. 햇살이 한쪽 눈은 괜찮아 보이네요?

네. 며칠 전에 수술했거든요. 근데 한쪽 눈만 해서 다른 눈은 아직 회색빛이에요.

아. 어쩌다가 백내장 걸리셨대요?

당뇨 때문에요.

우리 땡초도 당뇨성 백내장인데..

그전에 귓병이 나서 몇 달간 동물병원에서 스테로이드 성분이 든 약과 치료를 받았었거든요. 아무래도 그거 부작용으로 당뇨가 온 게 아닌가 싶어요. 쿠싱 증후군도 있고..

아. 우리 땡초도 귓병 때문에 스테로이드 치료 오래 받았는데 당뇨성 백내장이 왔어요.

그쵸? 여기 보호자들과 이야기해 보니깐 그런 경우가 꽤 되는 거 같던데. 이 정도면 스테로이드 부작용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알고 계속 처방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건지.

우리는 마치 임상시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결론을 내렸다.(대기실에서 만난 보호자들과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공통점이니깐)

그래도 보기 좋네요. 나이 드신 아빠랑 엄마가 함께 병원에 데려오시고.

땡초의 보호자는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다.

아이고 그런가요. 나는 처음에 강아지 데려오는 거 싫다고 했는데.. 딸내미가 어찌나 우기던지. 그래서 하는 수없이 반려견을 키우게 되었는데, 정작 땡쵸를 데려온 녀석은 시집가버리고 이제 우리가 키우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가만히 어머니와 땡초 아빠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따님이 결혼할 줄 알고 미리 땡초 입양 한 거 아닐까요? 부모님들 적적해하지 말라고.

어이쿠 그런 걸까요. 허허. 그래도 땡초가 집에 있으니깐 딸이 시집가서도 땡초 보러 집에 자주 오고 해서 우리는 좋지요. 땡초 없었으면 그렇게 자주 올까 싶은데.

땡초가 효자네요. 부모님과 따님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해 주니깐.

그러게요. 나도 처음엔 개를 왜 집에서 키우냐고 머라 하고. 주위 친구들도 이해 못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키우다 보니까 또 키우는 재미가 있네요.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제는 땡초한테 잘 보이려고 나도 좀 다정해지는 거 같고.

그죠? 저희 아버지도 그래요. 햇살이 집에 오고부터는 이야기할 거리도 생기고 하니깐 예전보단 다정해지시더라고요.

다들 그런가 봐요. 그런데 그렇게 귀여움만 받던 애가 이렇게 아프니까 참 마음이 심란하네요. 수술비로 몇 백씩 든다고 하니까 주위 친구들이 미쳤다고 하기도 해서 말도 못 꺼내겠고.

맞아요. 그 사람들은 반려견과 직접 교감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저 사람과 동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아요. 제 친구들도 돈낭비라고 생각하는 거 같던데 아버님 연세 분들은 더 이해 못 하시겠죠.

허허. 그러게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우리 딸이 얼마나 아끼는 녀석인데.


햇살이요~ 햇살이 보호자님~

간호사가 우리를 부른다.


아. 그럼 우린 진료받으러 들어가 볼게요.

네. 우리도 빨리 차례가 와야 할 텐데..


나는 햇살이를 안고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워낙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 진료실이 다섯 개고, 해당 진료실에 들어가서도 얼마간의 시간 동안 더 대기한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이 각 진료실마다 회진하시다가 오신다. 그렇게 진료실에서도 대기하다 보니 자주 보는 간호사들과도 친해져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어. 햇살이 왔네~ 어디 눈이 많이 좋아졌나 보자~

안녕하세요. 오늘 왠지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요.

어머 그래요? 뭐 달라진 건 없는데.

이것 좀 드셔보세요. 집에서 가져온 건데 맛있더라고요.

아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최근엔 거의 매일 출근하듯 병원에 가다 보니 이제는 간호사들도 병원 직원이 아니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지인 같아서 맛있는 게 있으면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에 맛있는 게 있으면 작은 거라도 가져가서 담당하는 간호사에게 챙겨준다.

우리는 대기하는 동안 눈이 마주치는 다른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원장 선생님을 기다린다.




백내장 수술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며칠 동안 여러 감정들이 오고 갔다.

수술 직후부터 얼마간은 위험한 순간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햇살이와 원장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만이 가득했지만, 수술 중 저혈압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직접 경험했기 때문인지 벌써부터 다음 수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술 전과 같은 일상. 하루 종일 반복되는 다음 안약 넣을 시간, 다음 주사 놓을 시간, 다음 약 줘야 하는 시간에 의한 압박감은 마음속 작은 여유마저 모조리 태워버렸다.

어디에도 이런 심정을 말할 곳이 없다는 점은 마음을 더 답답하게 했다. 주위에 반려견을 키운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고충을 토로하면 그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그럼 수술하지 마. 적은 돈도 아니고 왜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냐'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이전의 대화를 토대로 예상해 보면 뻔한 대답이다.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격이다. 그렇게 어디에도 말할 수 없고 위로받지 못하는 불편함이 가슴속에 점점 쌓여갈수록 병원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는 공간이 되었다.

매번 길어지는 대기 시간이 답답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대기실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을 쭉 둘러보면 그곳엔 저마다 사는 곳도 다르고 키우는 반려동물은 달라도 같은 심정으로 모인 사람들 이렇게 많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됐다. 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한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동병상련의 작은 커뮤니티. 그들은 항상 서로의 반려견과 서로의 사연에 관심을 가지며 웃는 얼굴로 대화한다. 그동안 병원 대기실에서 여러 보호자와 대화한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들이 자꾸 다른 보호자에게 말을 거는 건 자신의 고충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반려견을 위해 애쓰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는 거 같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위에서 미쳤다고 하니깐. 돈이 남아도냐고 하니깐. 반려견의 교감과 추억이 없는 자들이 너무나 쉽게 던지는 그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정말 헛돈 쓰는 건가. 돈 쓰고 고생하면서 욕먹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병원에 오면 그런 의심은 사라진다. 다들 반려견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함께했던 건강했던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 시간 동안 쌓인 '반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뭉친 사람들이다. 그런 분위기만으로도 지금 나의 수고는 헛되지 않은 행위이고 '이상하지 않은' 진심이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나만 고생하는 게 아니구나. 저 사람은 매일 어떻게 케어하고 있을까. 주사 잘 놓은 비법이라도 있는지. 서로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노하우를 교환하기도 한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로 힐링하며 잠시나마 약해졌던 마음은 다시 단단해진다.

그런 시간이 하루하루 쌓여가자 대기실에 있는 보호자들이. 병원의 직원들이. 진료실의 간호사와 수의사들이 낯선 사람이 아닌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지처럼 느껴졌다.

대기실에서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면 어떤 동지는 가끔 우스개 소리로 말한다. '자주 봐서 반가운 거 보단 볼 일 없는 게 서로에게 좋은 상황 아닌가요?' 그러면 나도 웃으면서 말한다. '아. 그렇네요. 제발 우리 좀 다시 볼일 없도록 반려견들이 다시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건강해져서 모르는 얼굴들만 대기실에 가득한 그날을 상상하며.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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