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가 가득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대하며.
햇살이는 시력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술한 날 저녁. 녀석은 감았던 눈을 뜨고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안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정확히 어머니의 입을 겨냥해서 할짝할짝 핥았다.
햇살아 이제 엄마 얼굴 보여?
녀석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몇 달 동안 햇살이의 눈 속을 가득 채웠던 뿌연 회색 안개는 걷혔고 다시 예전의 맑고 검은 밤하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매일 가던 병원은 이젠 이틀에서 삼일, 일주일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원장 선생님은 햇살이의 눈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아주~ 좋습니다!' 만족해하셨고 이제 당신도 두 다리 쭉 뻗고 숙면할 수 있겠다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하지만 내겐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녀석이 나를 보면 도망간다.
아침저녁으로 인슐린 주사와 안약을 넣는 사람이 나라는 걸 이젠 두 눈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못 보니깐 뒤에서 살짝 잡아 올리면 순순히 안겼는데, 시력을 회복하고 난 뒤부턴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는 추격자가 되고 햇살이는 도망자로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자신의 눈과 몸 건강을 위해 주사와 안약을 주는 건데, 녀석은 내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이럴 땐 참 답답하다. 사람이면 설명이라도 해줄 텐데. 매일 안약과 주사를 맞아야 네가 계속 건강할 수 있고 안질환을 예방할 수 있어. 아파도 조금만 참자. 하고.
과정이 좀 번거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더 이상 어디 부딪히지 않고 혼자서도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오고 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확연히 달라질 테니깐.
햇살이가 백내장으로 앞을 못 보던 어느 날. 나도 눈을 감고 햇살이처럼 네 발로 엎드려서 움직여 본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벽에 머리가 안 부딪힐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로 물이 있는 곳과 배변 패드로 찾아갈 수 있을지 햇살이의 입장이 되어서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앞을 못 보는 상태라고 상상하며 움직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내가 참 단순하게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함과 불안함이 밀려왔다. 안 보여서 물을 엎고 머리를 부딪히는 건 불편함의 일부에 불과했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 칠흑 같은 어둠이 삼켜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동안 햇살이를 끌어안고 꼭 다시 눈을 뜨게 해 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당뇨견에겐 여전히 여러 합병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당뇨와 쿠싱증후군까지 진단받은 녀석이니깐. 백내장은 치료되었지만 당뇨와 쿠싱증후군은 여전한 위험요소다. 보호자로서 병의 특징과 개선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할거 같아서 검색해 본 수많은 정보들 속엔 늘 '합병증 위험'에 대한 주의가 있었다.
당뇨와 쿠싱증후군은 평생 인슐린과 호르몬제를 투여받으며 살아야 한다. 요즘은 쿠싱약 때문인지 소화기관도 약해지고 예전보다 입맛을 많이 상실해서 밥 먹이는 것도 하나의 일이 되었다. 아무리 자료를 찾아봐도. 해외의 자료를 번역해 봐도 완치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병.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살았던 반려견도 있었다고 하니 거기에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치료가 아닌 유지를 목표로.
그러다 보니 이젠 하루하루가. 새롭게 다가오는 계절이 특별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계절의 변화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겨울이 머물던 무채색 들판에 형형색색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면 햇살이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햇살이와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봄을 함께 할 수 있을까.
당뇨도 백내장도 쿠싱증후군도 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이었기에. 우리의 남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지금 햇살이의 눈 속에 분홍분홍한 꽃들을. 작고 검은 콧구멍 속에 꽃향기를. 말랑말랑한 발바닥에 따뜻한 흙의 감촉을. 햇살이의 기억에 오늘의 봄날을 담아줄 수는 있다.
조금 더 꽃들이 만발하고 길가의 꽃향기가 강아지 친구들이 남긴 냄새까지 덮는 날이 오면 햇살이와 함께 꽃들이 만발한 시외에 다녀올 예정이다. 이전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계절의 추억을 녀석과 함께 담고 싶다.
에세이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햇살이의 병원생활이 길어지면서부터다.
다른 보호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우리 햇살이가 아프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반려견이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처럼 그저 기쁨과 행복만 주는 존재일 거라고만 기대했었다. 아마 반려견 입양을 고려하는 많은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적적하고 무거운 침묵 대신에, 봄바람처럼 따뜻한 호들갑으로 폴짝폴짝 뛰어와 쉴 틈 없이 홀짝홀짝거리며 반기는 작고 귀여운 존재.
주는 음식은 뭐든지 잘 받아먹고 곁에서 만져달라며 오두방정 떨면서 애교 부리는 그런 장면.
녀석이 내 허벅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누워있다는 것만으로도 맥세이프 무선충전기처럼 자동으로 행복이 완충되는 그런 기분. 우리는 애견샵 창에 붙어서 헥헥 거리며 눈 맞추는 강아지들을 보면서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며 녀석들을 데려온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를 '반려'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친밀한 공간으로 허락한다는 건 오직 기쁨과 행복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반려'라는 공간을 허락한다는 건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것과 같다.
수박의 단단한 껍질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연한 속살 같은 온전한 내 감정의 영역으로의 초대. 그래서 아무에게나 허락할 수 없는 가장 가까운 내적인 공간.
가장 가깝기 때문엔 반려견이 발산하는 기쁨과 행복은 늘 기대이상으로 마음에 전해진다.
반면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상대가 아프거나 힘들면 그 슬픔 또한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반응하게 된다.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려진 유기견들은 아마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상황을 버티지 못한 자들의 결과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상대에게 받는 기쁨만큼 줄 수 있는 책임감으로 반려견을 들여야 한다.
흔히들 반려견을 키운다는 것은 아이를 하나 키우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그런 표현 속엔 이러한 책임감도 뒤따른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기쁨도 있지만 그로 인해 책임져야 할 불편한 순간들도 있으니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고 관계의 책임을 배워나간다.
그렇다고 키우는 반려견이 아플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저 반려견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반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짝이 되는 동무'라고 설명한다.
'동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다. 힘들면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서로가 힘들 때 힘을 내어주는 그런 존재에게 우리는 '반려'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에세이가 이미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 보호자에겐 공감이. 새롭게 반려견을 입양하려는 예비 보호자에겐 예방주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에세이의 마침표를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