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쩔 수 없는 도시인이었어.
카오산 로드에서 마주한 복병은 낯선 문화,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에어컨.
더운 나라가 태국이 처음은 아니다.
코로나 이전에 베트남을 다녀왔고, 그전엔 괌, 그 이전엔 필리핀도 다녀왔었다.
하지만, 덥기로 유명한 그 나라들의 식당에도 에어컨은 있었다. 바깥의 뜨거운 햇살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먹고 마실 때만큼은 에어컨이 주는 쾌적함 속에서 음식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오산 로드에서 에어컨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식당.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맛집은 물론이고 일반 식당, 레스토랑 혹은 술집에도 커다란 선풍기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 에어컨은 없었다. 더군다나 카오산 로드 식당 메뉴의 대부분은 뜨거운 국물 요리 혹은 아주 높은 온도의 화력으로 순식간에 볶아 내는 요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몇몇 식당은 실내 보다 바깥이 더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뜨거운 열기는 마치 손님의 일부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면 애완견처럼 반갑게 달려 나와 매달렸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보자. 이렇게 더운데도 손님이 많은 건 이유가 있을 테니깐.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은 그 낯섦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가는 곳마다 음식은 꽤 만족스러웠다. 한국인들의 맛집으로 알려진 곳은 말할 필요도 없고, 외국인은 나 밖에 없는 로컬 식당의 생소한 음식마저도 입에 맞았다. 태국이 동남아 최고의 식도락 여행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역시 더위였다.
음식은 맛있는데, 먹는 동안 여지없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땀.
봄날의 새싹처럼. 온몸의 피부를 뚫고 올라오는 땀.
특히 뜨거운 국물 음식을 마주할 땐, 얼굴의 윤곽을 타고 흘러내리는 따가운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 온전한 식사가 불가능할 정도였고, 식사를 마치면 호텔로 돌아가 샤워하지 않으면 축축하게 등에 달라붙는 불쾌함 때문에 다음 일정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결국 빨래통에 쌓인 빨랫감의 개수를 세어보면 내가 먹은 끼니를 알 수 있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이제는 식당에 들어가면 오직 빨리 먹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나는 외쳤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제대로 식사를 즐기고 싶어!"
나는 침대에 엎드려 구글맵을 열었다. 샤워할 때마다 넘쳐나는 빨랫감 때문에 티셔츠도 더 필요하니깐, 쇼핑도 할 수 있는 대형 쇼핑몰을 검색했다. 여러 쇼핑몰이 검색창에 나타났고, 나는 그중에 가장 큰 쇼핑몰로 추정되는 센트럴 월드를 선택했다. 마침 근처에 유명한 환전소도 있으니깐, 오늘은 환전도 하고, 쇼핑도 하고, 에어컨 아래서 맛있는 밥도 먹으면서 컨디션 회복을 해야겠다.
다행히도 센트럴 월드는 여기서 버스 한 번으로 이동 가능했다.
호텔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십여분 정도 기다리자 버스가 왔다.
그런데, 첫날 카오산 로드로 올 때 탔던 버스와 숫자는 같은데 외형이 달랐다.
그날의 버스는 빨간색에 녹색 줄무늬였는데. 지금 오는 버스는 주황색이다. 순간 이 버스가 내가 타야 하는 그 버스가 맞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냥 탔다. 버스 정류장의 뜨거운 햇볕을 일단 피하고 싶었고, 제대로 탔는지 아닌지는 버스 안내원에게 물어보면 되니깐. 아니라고 하면 내리면 된다.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내부 시설도 달랐다.
며칠 전에 탔던 버스는 낡고 에어컨 없는 버스였는데, 이 버스는 한기가 느껴질 만큼 에어컨이 시원했고, 좌석의 품질이나 개수도 이전의 버스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 안내원이 다가왔다.
이 버스는 안내원의 복장도 달랐다. 짙은 브라운 색의 긴 재킷. 고급 호텔에서 볼 수 있는 직원의 복장과 비슷했다. 구글 맵의 목적지를 보여주자 안내원은 제대로 탄게 맞다고 했다.
다행이다.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눈 뜨자마자 외친 '에어컨'의 간절한 외침에 하늘이 반응한 걸까? 시내버스에 에어컨이 있다니! 나는 마치 관광버스라도 탄 듯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여유를 즐겼다.
버스가 목적지인 시암역에 도착하자마자 구글 맵을 통해 환전소를 먼저 찾았다.
센트럴 월드 근처에는 '슈퍼리치 방콕 타일랜드'의 본점이 있다. 이 환전소는 여러 지역에 지점이 있는데, 그중에도 본점의 환율이 가장 좋다. 오늘은 그동안 호텔 금고에 숨겨뒀던 오만 원짜리 지폐를 두둑이 챙겨 왔다.
환전소의 내부는 세련되고 깨끗했다. 쾌적한 에어컨은 기본이고 돈을 환전하는 방식도 한국의 은행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입구의 직원에게 여권을 먼저 보여줘야 한다는 것.
환전에 여권은 필수다. 입구에서 여권을 미리 확인하는 건 혹시라도 여권을 안 가져온 상태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 거라 추측해 본다.
나는 여권을 직원에게 보여준 후 대기표를 뽑고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20분 정도 기다리자 LED화면에 내 번호가 떴다. 나는 해당 창구로 가서 여권과 오만 원권 여러 장을 내밀었다.
직원은 내 여권과 환전 금액을 확인한 후 태국 화폐와 영수증을 줬다.
환율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고지한 것과 같았고, 같은 금액을 카오산로드에서 환전할 때와는 밥값 한 끼만큼의 차이가 났다. 만족감이 잔뜩 묻은 태국 돈을 지갑에 조심스레 채워 넣고 거리로 나섰다.
환전소의 바로 옆에는 '더 마켓'이라는 작은 쇼핑몰이 있었다.
이 쇼핑몰의 2층은 육교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차피 육교를 건너야 센트럴 월드에 갈 수 있기 때문에 가는 김에 구경도 할 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작은 잡화점들과 식당들이 많았다.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싶어 식당들의 메뉴를 확인했는데,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카오산 로드에선 못 보던 음식들도 몇몇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 볶음 라면을 주문했다.
각종 야채와 고기 그리고 부속물들이 볶음면 위를 덮고 있고, 국물이 기본으로 함께 나왔다.
먼저 국물을 한 모금 떠먹어봤다. 뜨거운 닭육수 맛이다.
따뜻한 국물이 온몸에 퍼지자 열이 슬슬 올라왔다. 하지만 열기는 몸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땀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땀이 되어 피부밖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할 때마다, 시원한 에어컨 냉기가 차가운 뿅 망치로 내려쳤다. 마치 오락실의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뿅망치를 맞은 땀들은 "왜 때려" "아야. 아야"하며 다시 피부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만의 쾌적함인가.
뜨거운 걸 먹어도 땀이 나지 않는.
티슈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
오직 먹는 것에만. 맛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런 순간이.
에어컨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커다란 차이가 될 수 있다니.
카오산 로드의 '어서 먹고 나가야겠다'는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고독한 미식가처럼 천천히 맛과 식감을 음미하며 음식을 즐기고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그 어떤 뜨거운 음식도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육교로 연결되고, 그 육교는 빅씨 마트와 길 건너의 센트럴 월드 앞으로 연결된다.
육교는 덮개로 덮여있어서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막아줬다. 방콕 시내에는 이런 식으로 고가에서 바로 연결되는 쇼핑몰들이 많은 편이다. 전철에서 바로 연결되거나, 쇼핑몰과 쇼핑몰 사이를 이어주거나 하는. 이런 고가의 좋은 점은 뜨거운 태양을 막아준다는 것과, 달궈진 지열에서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땅 위에서 걸을 때보단 시원하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도 좋았다.
센트럴 월드는 예상보다 굉장히 컸다.
크다고 해봤자 동남아의 쇼핑몰이 얼마나 크겠어? 별 기대 없었는데, 컸다. 아주 컸다.
높이가 아닌 길이만 본다면 한국의 백화점보다는 스타필드와의 비교가 더 적절해 보였다. 쇼핑몰 앞의 광장도 카메라의 초광각 렌즈로도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했는데, 광장의 일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켓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마켓에는 야시장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음식들과 기념품들로 가득했다.
마켓 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광장은 성탄절이나, 기념할만한 큰 행사가 있을 때 이벤트 장소로 활용된다고 했다.
여기에 비하면 카오산 로드는 시골이었구나..
나는 일부러 어깨를 펴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옷매무새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시골에서 온 사람 티가 나지 않도록.
센트럴 월드의 내부는 역시 쾌적했다.
끈적끈적하던 내 피부는 한순간에 뽀송뽀송해졌다.
1층, 2층의 내부 상점은 한국의 백화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타벅스가 가장 눈에 먼저 띄었고, 여러 패션 잡화 브랜드들이 줄지어 입점해 있었다.
뭔가 특별한 게 없을까.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각 층마다 간단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고, 여행객들을 위한 용품, 가전용품, 가방 등 다양한 상점들이 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니, 저 멀리 대형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방콕의 서점은 어떨까.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쇼핑몰 특유의 소음은 사라지고 잔잔한 통기타 음악을 배경으로 책 넘기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내부는 광화문의 교보문고처럼 여러 서적들과 팬시용품들로 가득했다.
태국에선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일까.
베스트셀러가 전시된 코너의 책들을 쭉 훑어봤다.
낯익은 표지가 눈에 띈다. 한국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주황색 조명의 상점 표지 디자인. 태국에서도 이런 표지 디자인이 유행하는 건가 싶어서 살펴봤더니.. 한국 책이었다!
6위에 랭크된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작가님의 책.
이 책이 태국에도 번역되었구나. 표지에 한글 제목이 적혀있어서 그 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십여 년 전 겨울.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에서 처음으로 삼성 광고를 봤던 그날의 반가움이 다시 밀려왔다. 옆에 현지인 친구가 있었다면, 이거 한국 작가의 책이라고, 나도 한국에서 왔다고 자랑하고 싶은 심정-내가 쓴 책은 아니지만,, 해외에 나가면 자랑스러운 한국의 모든 것들이 꼭 내 것처럼 기쁘다.-이었지만, 나는 들뜬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용히 카메라로 인증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그때 어떤 한 태국 여성분이 50밧 할인 쿠폰이 붙은 일회용 드립커피를 내게 내밀었다.
서점 안에 카페가 있는데, 이 쿠폰 들고 오면 할인해 준다고.
서점 안에 카페라니.
50밧이나 할인해 준다는 데 안 갈 이유가 없다.
직원을 따라 간 카페는 서점 내부에 있는 것치고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커피 가격을 보는 순간, 왜 50밧이나 되는 쿠폰을 주는지 금방 이해됐다.
가장 저렴한 가격의 아메리카노가 한국돈으로 5500원 정도였으니, 태국은 물론, 한국에서 내가 주로 가는 카페에 비해서도 비싸다. 나는 최대한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묻어나지 않도록 미소를 지으며 결제했다.
고가의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엔 학생, 어르신등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로 가득해서 한번 더 놀랐다. 태국의 평균 임금을 감안하면 굉장히 비싼 가격일 텐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다고? 나는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듯. 마치 매일 이런 카페에 오는 사람인 척 빈자리에 앉았다.
서점에 있는 카페답게 내부에는 책 읽는 사람이 많았고, 학생들은 문제집과 아이패드로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곧이어 직원이 커피 잔과 커피 기계를 가지고 내 앞으로 왔다.
맛은 사실 특별할 건 없었다. 고양이가 싼 똥의 원두로 만든 커피를 제외하고 전 세계 유명 산지의 커피를 저렴한 가격으로 마실 수 있는 한국에서 왔으니깐. 원두커피 맛은 어딜 가도 비슷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주문한 커피는 첫 모금엔 산미가 강했고, 가벼운 바디감에 약간 쓴 맛이 입안에 남았다.
어쨌든 오랜만에 고급 카페에 왔으니 글이라도 좀 쓰다가 가야겠다 싶어 가방에서 미니 블루투스 키보드와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실 태국에 도착한 후 여러 번 노트북을 열었었지만, 매번 문장은 칼국수처럼 진득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수제비처럼 툭. 툭 끊겨버렸었다. 뭔가 쓰고 싶은 글감은 계속 떠오르는데,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지독한 문장 변비에 걸린 환자.
여기서도 별 기대는 없지만, 이 쾌적하고 세련된 분위기 속에서 그냥 커피만 홀짝 마시고 나가긴 아까우니깐. 뭐라도 생산적인 일로 시간을 채우고 싶어서 키보드를 꺼냈을 뿐이었다.
꽤 오래 썼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오늘의 순간들이 기록으로 남았다. 쾌적한 에어컨의 힘일까.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지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딴짓하지 않고 글을 이어가다니. 그동안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쌓였던 스트레스의 변비가 한 번에 날아간 기분이다. 문장이 되지 못했던 내 안의 글감은 비워지고, 뿌듯함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반면에, 이렇게 쾌적한 환경이 뒷받침되어야만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글 쓸 수 있는 나에 대한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옛날 작가들은 전쟁 통에도 작은 수첩에 연필로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던데.
나는 언제쯤 환경을 초월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 속으로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것만 생각하자. 마음속 변비를 비워낸 것에 만족하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카페를 나섰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고 나는 다시 카오산 로드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이번엔 빨간 버스가 왔다.
카오산 로드로 처음 오던 날 탔던 에어컨 없는 빨간 버스.
마침 비까지 내려서 내부는 습하고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의외로 짜증이나 거부감은 일어나진 않았다.
하루 종일 에어컨 아래서 호사를 누린 덕분인지 마음 한편에 조그마한 여유가 생겨났나 보다.
열린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어왔지만 그냥 열어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인데 뭐.
어차피 갈아입을 옷이니 좀 젖으면 어때.
오히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빗물 젖은 도로의 야경에서 낭만이 느껴졌다.
똑같은 것을 겪어도 내 안의 여유에 따라 그 모든 것이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그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다.
며칠 더 지내다 보면 선풍기 속에서도 여유란 걸 찾아낼 날이 오겠지.
에어컨 없는 세상에도 한번 적응해 보자.
언제 이런 경험 한번 해보겠어.
버티다가 버티다가 도저히 힘들면 여기 와서 다시 충전하고 가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