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망고 조각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와 같은 것

왕랑시장의 망고 봉투에서 초콜릿 상자가 떠올랐다.

by 하임


오늘은 또 어떤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졸린 눈을 비비면 엄지와 검지의 아침 운동이 시작된다.

오므렸다. 폈다. 오므렸다. 폈다.

구글 지도 위에서 열심히 스트레칭하던 손가락은 짜오프라야강 건너편의 '왕랑마켓' 위에서 멈춰 섰다.

이제 엄지의 운동시간은 끝났다.

검지를 쭉 편다. '왕랑마켓'을 툭 친 후에 '후기' 리스트를 빠르게 스크롤한다.

'현지인들의 로컬 시장' '외국인이 거의 없어요.' '가격이 저렴해요' 후기들은 마치 호객행위라도 하듯, 내 취향과 완벽히 일치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동안 내 동선이 짜오프라야강 안쪽에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문득 강 건너편 세상이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관광지가 아닌 현지 로컬 시장이라는 점은 특히 마음을 끌었다.


나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여행에서도 늘 지역의 시장을 여행 일정에 넣을 만큼 시장 구경을 좋아한다. 북적이는 사람들이 발산하는 특유의 활기도 좋고, 지역 특산품 구경과 군것질 또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운 묘미니깐.

하지만, 해외에선 이런 작은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마저 쉽지 않을 때도 있다. 남미의 일부 국가 혹은 아프리카처럼 치안이 불안한 나라들은 로컬 시장 자체가 외국인들이 조심해야 할 위험 지역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필리핀에서도 그랬다.

현지인과 동행하지 않으면 로컬시장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 때문에, 꽤 체류기간이 길었음에도 단 한 번도 시장을 경험하지 못했었다.

반면에 방콕은 관광객들에게 호의적이고 비교적 안전한 국가이므로 그런 염려는 없다고 하니, 시장 구경을 안 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구글 맵이 안내하는 대중교통 경로까지 가까웠다.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강이 있어서 버스로 한참을 돌아갈 거라 예상했었는데, 구글 맵은 버스가 아닌 배를 타라고 했다. 심지어 호텔에서 선착장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고, 배에 탑승하면 왕랑시장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우와. 방콕에서 배를 타게 될 줄이야!

나는 뱃멀미 때문에 바닷배는 엄두도 못 내지만, 여기는 강이라 멀미 걱정은 없었다. 게다가 매번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고역 대신 시원하게 강을 가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오랜만에 페리도 타고 로컬 시장도 구경하고 식당에서 아침도 먹어야지!




선착장은 싼티차이 프라칸 공원의 강변과 연결되어 있었다.

싼티차이 프라칸 공원은 호텔과 가까워서 저녁에 노을 구경하려고 가끔 산책했던 곳이었는데, 여기가 선착장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해 질 무렵 노을 감상하기 좋은 뷰포인트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배를 타게 될 줄이야.


공원의 아침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가득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처럼. 아침형 새들이 서로 누가 더 일찍 일어나서 어떤 벌레를 먹었는지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누가 제일 일찍 일어난 걸까? 새들의 지저귐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본다고 내가 알 수가 있으랴.. 나는 다시 산책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강가로 걸어갔다.


강가에 이르자 저 멀리 선착장이 눈에 들어왔고, 선착장 바로 앞엔 내가 타야 할 주황색 페리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모처럼 확 트인 강가를 감상하며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려던 내 계획은, 나보다 먼저 도착한 주황색 배를 발견하자 산산이 부서졌다.

"아침의 여유는 무슨. 내가 그렇지 뭐."중얼거림은 이내 요란한 전력질주로 인한 "헥. 헥."으로 바뀌었고, 뽀송했던 등은 금방 땀에 젖었다. 아침의 여유 대신 땀을 얻은 나는 결국 오렌지 페리의 마지막 탑승자가 되어 배에 올랐다.




오렌지색 배는 성인 열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의 폭에 뱃머리와 꼬리가 앞 뒤로 굉장히 길었다.

마치 베네치아 운하 속 곤돌라의 양쪽을 손가락으로 잡고 길게 늘이면 이런 모양이 될 것 같다.

물고기로 비유하자면 갈치처럼 좁고 길었다.

배는 목재로 만들어졌고 햇볕을 가려줄 천장은 있었지만 창문은 없었다.


배는 곧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옆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굉음과 기름냄새가 배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왠지 모를 설렘.

목적지를 향한 이동수단이지만, 마치 관광 유람선을 탄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록 넘실거리는 강물은 진한 미숫가루 같은 흙탕물이고, 에어컨은 없었지만, 확 트인 풍경과 달릴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시원했다.

태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관광객의 기분.

갈매기도 없고, 새우깡도 없지만, 해운대 유람선을 탔을 때의 기분과 다르지 않았다.

해운대 유람선은 다 좋았지만, 한 번씩 울렁이는 파도가 거슬렸었는데, 짜오프라야 강의 페리는 어느 한 브랜드의 침대 광고처럼 "흔들림 적은('없는'은 아님) 편안함"이었다. 가끔 오고 가는 배로 인한 물결로 흔들리긴 했지만, 바닷배에 비하면 요람 수준이다.

덜덜덜 엔진소리와 기름 냄새는 요람 속의 승객들이 행여나 목적지를 놓칠까 봐. 더욱더 요란하게, 진하게 귀와 코를 깨우는 듯했다.




페리는 십 분만에 목적지인 prannok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의 내부는 예상보다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잘 관리된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분위기.

다만, 화장실은 유료였다. 유럽 이후 처음 마주한 유료 화장실이었지만, 5밧(210원 정도)이라는 저렴함 가격에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화장지까지 구비되어 있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작은 볼일만 보고 나오긴 아쉬울 정도였다.


여객선 터미널의 출구는 왕랑 시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통로 하나를 지나자마자 모던한 터미널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재래식 시장의 풍경이 펼쳐졌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나라 재래식 시장과 비슷했다. 사람과 오토바이만 겨우 지나다닐 만큼 좁은 통로, 그리고 양옆으로 촘촘하게 늘어선 작은 가게들.

태국에 오면 한 번쯤 구입한다는 시원한 코끼리 바지, 한 땀 한 땀 손으로 직접 짠듯한 미니 크로스백. 크고 작은 장식물들, 활기 넘치는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이는 가게들. 그들이 흥정하는 목소리는 뜻은 알 수 없어도 정겹게 들렸다.

곧이어 현지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와 과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라면 이곳의 과일 가게들은 먹기 좋게 손질해서 비닐에 담아 일 인분으로도 판매한다는 점이었다.


거주인이 아닌 여행객들에겐 이런 게 참 좋다. 여행객은 과도를 따로 챙겨 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나처럼 혼자 온 이들에게는 여러 개의 과일이 담긴 비닐봉지를 하루 종일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짐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카오산 로드에서도 잘라서 판매하는 과일점을 보긴 했지만, 여기에 비하면 거기는 관광지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는 현지인들을 상대하는 시장이라서 그런지 카오산로드보다 가격도 더 저렴하고 과일의 종류도 더 많았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나는 태국에서 아직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망고를 구입했다.

망고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져서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고, 이쑤시개와 함께 줬다.


계산을 마치고, 걸어가면서 비닐봉지를 열어봤다.

비닐봉지 안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의 망고 조각들이 가득했다. 망고 하나를 통째로 잘라 넣은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망고를 무작위로 섞어 담은 듯했다.

그중에 작아 보이는 두 조각을 먹어봤다. 처음 먹은 망고는 복숭아처럼 아삭하고 덜 달았고, 두 번째 먹은 망고는 달고 물렁했다. 망고는 당연히 물렁하고 달콤한 과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복숭아처럼 아삭한 식감의 망고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얀 비닐봉지 안의 망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뜬금없이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대사가 생각났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도 같아서 어느 것을 고를지 알 수가 없다"

초콜릿 상자에는 여러 종류의 초콜릿이 들어 있지만, 그중 하나를 집어먹어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의미라고 했다. 인생의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잘 묘사한 명대사로 유명하다. 외우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었는데, 평소에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도조차 못 하거나 망설이다 놓쳐버린 기회들에 대한 후회가 많았던 탓인지, 그 대사는 저절로 기억에 남았다.


나는 비닐의 입구를 손으로 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리고 비닐봉지 속을 보지 않고, 이쑤시개를 봉투 안에 넣어서 잡히는 걸 밖으로 꺼냈다.


아삭아삭한. 약간은 싱거운 복숭아 식감의 망고가 씹혔다.

아. 맛없는 망고가 잡혔구나. 단 맛이 전혀 없고 아삭한 식감만 있네.

우걱우걱 입 속으로 빠르게 밀어 넣고, 또다시 이쑤시개를 비닐봉지 속에 넣었다. 이번에도 딱딱한 망고였다. 그런데, 아까보다는 아주 약간 더 달콤했다.

복숭아로 비유하자면, 먼저 먹은 건 백 퍼센트 하얀 복숭아. 지금 먹은 건 빨간 몽고반점이 있는 하얀 복숭아 같은 맛. 그러니까 이번 것은 빨간 몽고반점만큼의 미세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씩 무작위로 먹다 보니 맛있는 망고는 맛있어서 좋고, 맛없는 망고일수록 다음에 먹는 망고의 아주 작은 단맛까지 부각해 주는 역할을 하니깐,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마지막 남은 망고를 삼키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태국에 살고 있고, 아이가 있다면 나는 초콜릿 상자 대신 이런 말을 해줄 거 같다.

"인생은 망고 조각이 담긴 비닐봉지와도 같아서 어느 것을 고를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네가 손에 든 것이 맛없는 조각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달콤한 미래를 곧 만나게 될 거고, 맛있는 조각이라면 지금 이 순간 충만한 행복을 선사할 테니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조각은 없는 거야."


이번 여행은 나에게 어떤 망고가 될까.

달콤한 망고라면 행복한 추억만 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어서 좋고, 딱딱하고 싱거운 망고라면 돌아갈 내 일상을 여행보다 달콤하게 만들어 줄 테니 좋을 것이다.


어느덧 시장의 끝에 다다른 나는 내 여행의 다음 망고 조각을 기대하며 구글 맵을 다시 켰다.

구글 맵 위에서 내 위치를 알리는 파란 점이 마치 망고 조각을 집어 들 이쑤시개처럼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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