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백화점에서 마주친 귀신

by 하임

오늘도 무더운 아침이다.

강렬한 햇볕은 내가 호텔을 나서자마자 다시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나그네 외투 벗기기' 타이틀 전에서 바람에게 승리한 해님이 이번엔 '집으로 돌려보내기' 챔피언전에 나갈 준비라도 하는 듯 무섭게 내리쬔다.

그 열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내 지갑 속 태국 지폐마저 뜨거운 열기에 증발해 버린 듯 텅 비어 있었다. 지갑 바닥까지 쩍쩍 갈라지기 전에 얼른 환전소의 댐을 열어 지갑의 저수지에 지폐를 채워 넣어야 한다.

나는 오만 원권 여러 장과 여권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방콕에서 가장 환율이 좋은 환전소를 먼저 들러 지갑의 가뭄을 해결한 후 두둑한 마음으로 근처 백화점 입구로 들어섰다. 이젠 몇 번 와본 곳이라 모든 게 익숙하다. 눈을 감고 들어가더라도 오른쪽에 스타벅스가 있고, 왼쪽에 팝업 스토어가,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가면 위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게 눈앞에 그려질 정도다.

그 익숙한 풍경을 뒤로하며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계단에 섰다.

이대로 끝까지 올라가면 식당가가 나올 테고 나는 그곳 식당 혹은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해결할 예정이다.

그렇게 2층을 지나 3층으로 막 올라가려고 할 때, 익숙한 풍경 속에 예상치 못한 새로움이 끼어 있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에서 혼자 도드라지는 다른 그림처럼, 그 낯선 장면에 나도 모르게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내디뎠다.


한 잡화 매장의 직원 월굴이 유난히 하앴기 때문이다.

자세히 봤더니 하얀 얼굴과 대조적으로 입가는 유난히 붉고 두꺼웠다. 마치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의 순한 버전 같았다.

애초에 상품을 구입할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직원의 분장 때문에 급하게 내린 걸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매장 옆을 지나가려고 애쓰는데,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꾸만 점원에게 눈길이 갔다. 복장은 분명 매장 유니폼인데, 얼굴은 유난히 하얗고, 테이블 위에는 작은 호박 장식품이 올려져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오늘이 핼러윈 데이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쇼핑몰.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고급스러운 백화점에서 핼러윈 복장을 한 직원이라니.

어느새 매장을 지나왔음에도 자꾸 뒤돌아 보고 싶을 정도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공포영화를 보면 이럴 때 주인공이 뒤돌아보면 꼭 귀신이 순간이동해서 바로 뒤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뒤를 돌아보고 싶은 궁금함을 억지로 참으며 앞을 주시했다. 그리고 핼러윈 분장을 한 또 다른 직원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때부터 나는 진열된 상품보다 직원에게 더 눈길이 갔다. 대부분의 다른 직원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단정한 모습이었으므로 핼러윈 코스프레를 한 직원을 찾을 때마다, 마치 구석구석 숨겨둔 보물 찾기에 성공한 것처럼 반가웠다. 뺨에 작은 유령 그림을 그린 직원, 꼬깔콘 모양의 검은 마녀 모자를 쓴 식당 점원 등 각자의 개성이 묻은 다양한 귀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조명도 조금 더 어둡게 하고, 빨간 핀조명도 더하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여기는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인 걸 감안한다면 지나친 욕심일 거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조명을 어둠게 하면 판매해야 할 상품이 잘 안 보일 테니깐.


그래도 이왕 이렇게 하는 거.

백화점의 한층 전체를 아예 핼러윈 콘셉트로 꾸며봤다면 어땠을까. 명품이나 귀금속 같은 매장은 그 고유의 이미지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캐주얼한 잡화 쪽은 괜찮지 않을까. 핼러윈스럽게, 전체적인 조명은 조금 어둡게 하고, 상품은 핀 조명으로.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하는 쇼핑.

계산할 때도 일정금액 한도 내에선 피로 대신 지불할 수 있게 한다던지. 아. 물론 진짜 피 말고, 헌혈증 같은 건 어떨까. 그렇게 모인 헌혈증은 백화점 이름으로 병원에 기부한다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신선한 충격은 자꾸만 신나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은행원이었고,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직접 찾아가서 입출금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 업무를 맡았을 땐 외부에서 현금이 가득 든 전동차를 관리해야 하는 특유의 긴장감 때문에 힘들었는데, 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고, 익숙함은 점점 무료함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업무지만 뭔가 변화를 줄 수 없을까. 고민하던 때쯤 날씨는 점점 차가워졌고 달력의 숫자는 어느덧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다. 거리엔 크리스마스 캐럴이 간간이 들렸고, 카페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반짝였다.

그때 나는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부장님을 통해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 나는 그 아이디어를 실행했다. 전날 마트에서 구입한 크리스마스 장식품들을 매일 끌고 나가는 금고 전동차에 꾸미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는 전구는 없었지만, 눈송이처럼 하얀 솜과 방울,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한 전동차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막상 거리로 나서려고 하니 쑥스러웠다. 금융 쪽은 비교적 보수적이고 무게가 있는 업종인데, 이런 장식을 혹시라도 고객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첫 번째 방문한 가게의 사장님의 반응을 통해 금세 사라졌다.


"와. 크리스마스라고 멋 낸 거야? 이쁘다. 몇 년간 거래하면서 이런 건 또 처음이네."


두 번째, 세 번째도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가게 사장님은 밖으로 나와서 전동차를 살펴보며 하루 종일 가게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깐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실감이 난다고 좋아하셨다. 예상보다 긍정적인 반응에 신이 난 나는 그다음 방문하는 곳부터 첫인사로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외쳤고, 가게 밖을 나설 땐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로 인사를 대신했다.

퇴사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생길 만큼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날 고객들이 내가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실감했듯이, 백화점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매장직원의 핼러윈 분장은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무더위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내게 핼러윈이 다가왔음을 실감 나게 했다.

말 한번 섞진 않았지만, 아마 저 직원도 오늘 아침에 정성스럽게 분장하면서도 '혹시 고객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때의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진 않았을까.




만약 내가 그 매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일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해줬을 거 같다.


"다른 매장에 갈려다가 핼러윈 분장 하신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와서 여기서 구매하게 되었어요. 아침부터 분장하느라 고생하셨죠? 마음 같아선 핼러윈 사탕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가진 게 없네요"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보물 찾기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백화점의 맨 꼭대기의 푸드코트에 도착해 있었다.

"아. 나. 밥 먹으러 왔었지."

그제야 본연의 목적을 깨달은 순간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럼 어서 매끈한 목덜미를 물어서 신선한 피를.. 아.. 아니'

정신을 차리고 메뉴판을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으스스한 피 대신 따뜻한 치킨 덮밥이었다.

주문한 치킨 덮밥을 입에 넣은 후 생각했다.

'만약, 드라큘라도 치킨 덮밥을 맛본다면, 더 이상 매끈한 목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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