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여행의 기분을 느끼며 태국의 모든 음식을 한자리에서.
2주간의 방콕 생활에서 쇼핑몰 탐험은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웬만한 우리나라 백화점보다 큰 대형 쇼핑몰부터 동대문 시장처럼 저렴한 옷들이 가득한 곳, 전자제품 전문 쇼핑몰, 기념품을 파는 대형마트까지. 이 모든 곳을 찾아다닌 이유는 따가운 햇살에서 벗어난 쾌적함을 찾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흥정에 취약한 내 성격상 정찰제 제품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많은 쇼핑몰을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유난히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 방콕에서 단 하루의 시간만 보낼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곳. 쇼핑몰이 단순한 쇼핑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여행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그곳은 바로 '터미널 21 아속'이다.
방콕의 중심지에 위치한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지하철이 가장 편리하다.
아속역 출구의 스카이 워크는 터미널 21의 입구와 바로 연결된다. 특히, 스카이 워크는 유리천장으로 덮여 있어, 뜨거운 햇볕이나 방콕 특유의 갑작스러운 소나기에도 우산 없이 쇼핑몰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다.
터미널 21의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탐지기를 통과해야 한다.
아마도 얼마 전 방콕의 어느 쇼핑몰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 보안 강화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은 그냥 통과가 가능하지만, 큰 가방을 가진 사람은 안을 열어서 위험 물질이 없는지 보안요원에게 보여줘야 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길이가 36m에 달하는 거대한 에스컬레이터가 1층에서 4층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덕분에 5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높은 천장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왼쪽의 통유리를 통해 자연광이 쏟아졌고, 천장을 받치는 거대한 회색 기둥과 기둥을 잇는 각 층의 곡선형 난간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회색빛 곡선이 지배하는 이 풍경은 마치 SF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 긴 에스컬레이터에 제복을 입은 일행이 서있다면, 다른 행성으로 비행을 준비하는 우주 비행선의 승무원처럼 보였을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중심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는 2,3,4층의 난간에 기댄 구경꾼들은 다른 행성으로 마음껏 이동이 가능한 그들의 특별한 계급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것만 같은 상상.
그만큼 에스컬레이터는 거대하고 길다. 마치 하늘까지 이어진 천국의 계단처럼.
내게 우주선 터미널 같은 첫인상을 남긴 이곳은 실제로 세계 각국의 공항을 콘셉트로 지어진 쇼핑몰이다.
그런 콘셉트답게 입구의 정면엔 터미널 21이라는 간판 아래로 검은색 테두리의 동그란 시계들이 줄지어 걸려있는데, 이는 여러 국가들의 현지시간을 표시하고 있다.
4층까지 바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만 있는 건 아니다.
한 층씩 올라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들도 따로 설치되어 있다. 각층의 입구에는 공항의 안내판을 연상케 하는 짙은 남색의 게이트가 세워져 있고, 게이트에는 'level +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1층은 M, 2층부터 레벨 1로 시작해서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레벨 2, 3, 4로 표시되며, 각 층마다 여러 나라의 주요 도시 콘셉트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다.
M층은 파리, 레벨 1은 도쿄, 2는 런던, 3은 이스탄불, 4,5는 샌프란시스코의 공항이 콘셉트이다. 아쉽게도 인천공항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쇼핑몰이 지어진 시기가 Kpop의 유명세가 덜했던 2011년이어서 그런 듯했다. 만약 2025년에 같은 콘셉트의 쇼핑몰이 지어진다면 한국도 추가되지 않았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봤다.
레벨 1의 도쿄 콘셉트 천장에는 일본풍의 홍등들이 줄지어 걸려있다. 곳곳에는 일식집 입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천 가림막과 벚꽃 그림이 가득했고, 두 명의 스모 선수가 서로 마주 보며 겨루는 포즈의 동상과 일본화풍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어두운 조명은 마치 일본의 어느 도시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보는 신기한 콘셉트에 평소보다 두 배 커졌던 내 두 눈은 한 잡화매장 앞에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빨간 동그라미를 중심으로 펴져있는 붉은색과 흰색의 직선들. 전범기였다.
독일 콘셉트의 매장에도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을 걸어둘 수 있을까? 매장 주인은 저 상징의 의미는 알고 걸어둔 걸까. 일본 문화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가끔 저렇게 선 넘는 풍경을 마주할 때면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찌푸린 미간을 다시 펴기 위해 나는 급하게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레벨 2인 3층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곳이 런던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빨간색 테두리 원 안에 채워진 하얀색, 그 위를 가르는 파란색 직사각형 위에 새겨진 하얀 글씨는 런던의 지하철 표지판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론 눈치채지 못할까 봐 표지판 아래는 런던 특유의 빨간색 공중전화박스가 그려져 있고, 기둥 옆에는 사람 크기의 영국 근위병이 세워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런던'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쯤 되니 앞으로는 인테리어만으로 도시를 추측해 보면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몰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빨간 2층 버스 모형이 보였고, 2층 버스 모형 앞에선 태국의 어린 친구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대한 모형 같았던 빨간 버스의 안쪽은 실제로 잡화를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홍등이 천장에 매달려 있던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엔 커다란 영국 국기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고 그 아래는 장난감과 잡화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남성용 의류를 팔았고, 가격은 만원 안팎으로 시장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저렴한 제품이 많았다. 카페 앞에는 호두까기 인형이 서있다.
레벨 3은 이스탄불이었고, 레벨 4와 5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식당과 푸드 코트였는데, 샌프란시스코가 콘셉트이었다.
각 층마다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가 다르고 인테리어가 달라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특히 놀라운 점은 화장실 인테리어까지 각 도시의 콘셉트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세심함과 아이디어가 놀랍고 신기해서 각층의 화장실마다 들어가서 인테리어를 구경했다.
레벨 5에선 금문교 다리의 모형이 보였고, 다리 모형 너머로 거대한 푸드 코트가 보였다.
푸드코트의 이름은 피어(pear) 21.
그곳은 지금까지 내가 가본 푸드코트 중에 가장 규모가 컸다.
입점해 있는 식당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는데, 방콕에서 경험한 음식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들어는 봤지만, 방콕에선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팟타이, 쏨땀, 똠양꿍 같은 태국 대표 음식은 물론, 혼자 식당에서 먹을 수 없는 랭쎕(뼈다귀 탑)과 망고밥, 생과일주스, 태국 전통 디저트등 음식의 숫자만 보면 웬만한 야시장보다 많았다. 가격 또한 로컬 식당만큼 저렴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먹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어느 똠양꿍 가게 앞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서 음식 번호를 말하고 현금을 꺼내는 순간. 현금 결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신용카드를 내밀었지만, 신용카드도 안된다고. 그럼 뭐가 되는 걸까. 뒤에 줄 선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내게 직원이 pear21 글자가 새겨진 카드를 하나 꺼내서 보여줬다. 충전식 카드며, 저기 끝에 가면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직원의 손끝을 따라 걸어갔다. 식당을 지나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하는 테이블들을 지나 한참 걸어가자 반대편 끝에 작은 부스가 보였고, 부스 앞엔 사람들의 긴 줄이 꼬리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식사하는 테이블까지 이어진 긴 줄을 보는 순간, 아무리 맛집이라도 줄 서서 뭐 먹는 걸 선호하지 않는 나는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매력적인 가격과 수많은 메뉴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나는 그 줄의 새로운 꼬리가 되었다. 예상보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나는 부스 안 직원의 앞에 섰다.
이 카드는 어떻게 구입하는 거냐고 직원에게 물었다.
현금을 주면 그 현금만큼 카드에 돈을 충전해 주고, 만약에 충전 금액이 남으면 여기서 남은 금액만큼 환불해 준다고 했다.
우선 100밧만 충전했다. 둘러본 식당들의 음식의 가격이 대부분 50밧 전후였기 때문이다.
처음이니깐, 남은 금액이 확실하게 환불되는지를 경험해 보고 다음에 올 땐 더 큰 금액을 충전할 예정이다.
충전된 카드를 들고 나는 다시 똠양꿍 가게 앞에 섰다.
메뉴마다 음식 사진과 간단한 설명, 가격이 함께 적혀있고, 각 음식마다 번호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주문할 때 음식의 숫자를 불러주고 결제하면 되는 편리한 방식이었다.
원하는 음식의 번호를 직원에게 말하면 직원의 안내에 따라 충전카드의 뒷면의 QR코드를 바코드 기계에 찍으면 바로 결제가 됐다. 신용카드처럼 승인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잔돈을 거스를 일도 없으니,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도 결제 때문에 긴 시간 지체할 일은 없어 보였다. 결제 후에는 바로 옆에 있는 배식구 앞에서 기다리면 금방 음식이 나왔다.
동남아 국가에 대한 편견이 한순간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해외에 나가면 항상 우리나라보다 느리고 불편한 시스템이 대부분이어서, 여행을 시작할 때마다 늘 '여행지의 기대치'를 아주 낮게 잡았었다. 그래야 불편함에 화딱지가 나지 않으니깐.
그런데 이곳 시스템은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선진적인 시스템이라 놀랐다.
우리나라에도 평소 사람들이 붐비는 푸드코트가 있다면,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다.
수저통은 푸드코트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특이한 점은 수저통 바로 옆에 살균기가 있다는 것이다. 수저통에서 바로 수저를 들고 테이블에 앉아서 먹을 수도 있지만, 위생을 철저히 하고 싶은 손님은 살균기 안에 수저를 잠깐 넣으면 초록색 불이 들어오며 '띠~' 하는 알림음으로 살균이 끝났음을 알려줬다.
살균된 수저와 똠양꿍을 가지고 빈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각 구역은 조금씩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커다란 통유리가 있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전망 좋은 곳에서 로컬 시장 가격으로 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빌딩 뷰이긴 했지만, 웬만한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똠양꿍과 계란덮밥 세트였다.
엎어놓은 공깃밥 위에 오므라이스처럼 생긴 달걀이 올려진 음식과 똠양꿍 세트.
똠양꿍에는 새우와 각종 채소와 버섯이 들어있었고, 붉은빛의 국물 위에 더 진한 붉은색의 고추기름이 띄어져 있었다.
와. 드디어 똠양꿍을 먹는구나.
진짜 여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음식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귀국할 뻔했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안에 넣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굉장히 독특한 맛이었다. 첫맛은 얼큰한 고수향이 났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함에 이게 무슨 맛이지 할 때쯤,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고 난 후엔 입안에 시큼함이 남았다. 똠양꿍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굉장한 독특한 맛이었다. 처음 먹어서는 모르겠고, 베트남에서의 고수처럼 여러 번 먹어봐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함께 나온 밥은 아무런 양념이 안된 맨밥에 짭짤한 간이 된 오므라이스 달걀이 올려져 있었다.
낯선 맛과 익숙한 맛의 오묘한 조화 속에 어느새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졌고, 다 먹은 그릇은 우리나라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빈 그릇 반납대에 올려놓는 방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생과일주스를 주문하러 갔다. 생과일주스의 메뉴도 야시장보다 더 다양했다.
메뉴에 해당하는 과일들은 미리 투명한 플라스틱 컵 속에 담겨 있었고, 주문과 즉시 해당 컵에 담긴 과일을 믹서기에 얼음과 함께 갈아서 줬다.
땡모반(수박주스)은 카오산로드에서 자주 마셨으니, 안 마셔본 패션후르츠를 주문했다. 시원하고 새콤 달달한 생과일주스를 마시자 입안을 맴돌았던 똠양꿍의 묘한 흔적이 모두 씻겨져 내려갔다.
음료는 창가의 벽 앞에 마련된 일인석에 앉아서 마셨다. 방콕 빌딩들의 풍경을 보며 음료를 들이켜다가 우연히 벽을 봤는데 샌프란시스코의 해변에서 볼 수 있을법한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둘기에게 밥을 주지 마시오'
'밥 먹고 30분 안에 서핑을 하지 마시오.'
뜬금없는 디테일에 웃음이 났다.
"어차피 저는 서핑은 커녕 수영도 못하니깐 걱정하지 마세요."
"비둘기에게 줄 밥은 없어요. 내가 다 먹었거든요.."
나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충전 카드의 남은 금액을 환불받은 후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그리고 1층으로 한 번에 내려가는 4층의 긴 에스컬레이터 위에 올랐다.
내려가는 동안 이스탄불, 런던, 도쿄의 난간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지금 제복을 입고 내려가고 있다면, 저들도 나를 SF 영화 속 우주 비행사로 착각할까?
즐거운 상상 속 여행의 끝엔 터미널 21 입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