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에서 "OK"까지. 카오산로드의 특별한 인연
카오산 로드의 밤거리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협곡이 있다.
길게 뻗은 여행자 거리가 급격히 좁아지는 중간 어디쯤. 마치 강물에 쌓인 퇴적물로 인해 갑자기 강폭이 좁아지듯이. 해가 저물면 양쪽으로 마주 보며 줄지어 있는 술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노천 테이블을 펼쳐 거리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널찍하던 거리는 순식간에 오전의 3분의 1로 줄어든다. 반면에 밤이 되면 급격히 늘어나는 사람들의 행렬은 좁아진 거리를 가득 채운다.
출퇴근 시간의 서울 강변북로처럼 정체된 인파. 거북이 걸음하는 자동차의 매연 대신 앞사람의 정수리 냄새를 맡으며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고 제자리걸음에 가까운 보폭으로 조금씩 전진하는 사람들. 매일밤 이곳은 상습 정체구역이다.
수많은 사람들, 느린 걸음걸이.
좁아진 강폭에 몰린 물고기를 외면할 수 없는 낚시꾼처럼, 느린 유속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곳은 호객꾼들에겐 최적의 장소다. 노천 테이블의 최전선은 나름대로 치장한 20대 초반의 남녀 호객꾼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파닥거리는 행인들을 낚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매일밤 카오산로드를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처음 카오산 로드에서 이런 광경을 마주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었다.
특히 나는 호객행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앞으로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파 속에서 신경이 곤두서 있던 터라,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는 호객꾼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색하며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우회할 적당한 길이 없었다. 나는 매일 밤 그곳을 지나가야만 했고, 같은 상황을 매일 겪다 보니 다음 날은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서로의 얼굴에 익숙해지는 사이가 되었다.
아는 얼굴은 무섭다.
이젠 "NO"라고 정색하기엔 미안해졌다.
나는 정색 대신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야 해" "마사지 받으러 가는 길이야" "다음에 올게"하는 식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나는 그들에게 '어차피 호객행위가 통하지 않는 행인' 혹은 '매일 동네 산책하는 외국인'이 되었고, 이제는 호객 대신 서로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언젠가 새로운 남자 직원이 나에게 호객을 시도했을 때, 내 얼굴을 아는 여직원이 그를 말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묘하게 친밀해진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2주간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길에서 다른 호객꾼을 마주할 때마다 늘 카오산 로드의 '호객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치앙마이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카오산 로드로 돌아왔고, 오랜만에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금방 내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야"
나는 그동안 치앙마이에 다녀왔고, 며칠 후엔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럼 맥주 한잔하고 가라고 권유했고, 나는 못 이긴 척 웃으며 NO 대신 "OK"를 외치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내가 진짜 가게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는 놀라움과 함께 신나는 표정으로 내게 어디에 앉길 바라냐고 물었다.
나는 길거리에서 가장 가깝고 바에서 가장 먼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 한 병이 주량인 내가 내부로 들어가 봤자 자리만 차지할 뿐 매출엔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테니깐.
옆 가게의 호객꾼들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 손님은 자기가 몇 번이나 공들였다는 식으로 웃으며 말을 주고받는 거 같았다.
자리에 앉자 그녀는 메뉴판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밥을 먹고 오는 길이라 내심 작은 병을 원했지만, 그동안의 인연에 작은 병은 걸맞지 않은 기분이 들어 맥주 큰 병 하나를 주문했다.
'호객으로 들어왔는데 팁은 줘야 할까, 아니면 그냥 마시고 나가도 될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녀가 맥주를 들고 왔다. 그녀는 정중하게 한 잔을 따라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얼른 한 모금을 마셨다. 그녀는 "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시 호객 행위를 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막상 테이블에 앉으니 매우 뻘쭘했다. 라이브 바라면 밴드 공연이라도 구경할 텐데, 이곳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클럽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민망해서 두리번거리자, 마침 옆집 바의 호객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왜 이 술집에 앉아 저 술집의 호객행위를 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보지 않으려면 몸을 뒤로 돌려야 하는데, 뒤의 풍경은 가게 안에서 술 마시는 다른 손님들 뿐이었다. 모르는 손님들의 음주 장면을 훔쳐보는 것보다는, 옆집의 호객 알바들을 구경하는 편이 훨씬 덜 이상하지 않을까. 그러니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은 그들뿐이었다.
처음에는 민망했지만, 계속 관찰하니 흥미로웠다.
짧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은 복장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메뉴판을 보여주고, 여기서 먹고 가라고 권했다가 외면당하면, 그들은 여고생들처럼 괜히 심술 한번 부리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사실 이 정도는 호객행위라고 하기엔 굉장히 '순한 맛'이다.
사람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거나 유혹을 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게 메뉴판을 보여주며 자기 가게에 들르기를 권유할 뿐이었다. 상대방이 싫은 기색을 보이면 미련 없이 조용히 물러섰다.
가끔 장난처럼 메뉴판으로 거절하는 손님의 엉덩이를 툭 치기도 했지만, 이곳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 정도는 친근한 장난, 혹은 작은 투정 정도로 여겨졌다.
방콕 중심가의 호객 행위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어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중심가의 호객꾼들은 멀리서 그 모습만 보여도 괜히 겁먹어 근처에 지나가지도 못할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이곳 카오산 로드의 호객은 천진난만한 장난, 일종의 놀이처럼 느껴진다.
"우리 가게에 이런 거 팔아요. 들어오세요. 싫으면 말고요." 딱 이런 느낌이다.
"아이고 사장님 폰 케이스 무료로 드릴게요. 일단 들어오세요"하며 잡아끄는 한국의 통신사 호객행위보다도 순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카오산 로드에서 이성 간의 끈적한 분위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성(性)' 개념이 아직 여물지 않은 학창 시절 분위기와 같다고 할까. 오픈 클럽이나 야외 테이블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봐도 "와 섹시하다"보다는 "쟤 왜 저래?" 하는 웃음이 먼저 나오는 흥겨운 몸짓이다. 말 그대로 수학여행처럼 친구들과 순수하게 노는 분위기다. 이런 점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십 분 넘게 지켜봤지만, 그들의 노력에 비해 가게로 들어오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행인들은 지난날의 내 모습처럼 강하게, 때로는 완곡하게 그들을 거절했다.
계속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그들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실패할 땐 함께 '에이~'하고 아쉬워하고, 성공했을 땐 축하의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두 팀 정도 유치에 성공하는 걸 보았다. 호객 알바가 기쁜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쳐다봤고, 나는 박수 대신 엄지를 치켜들어 무언의 축하를 건넸다. 그녀는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들어간 손님은 함께 들어간 알바를 통해 술을 주문했고, 주문을 받은 알바들은 술을 그들에게 전해준 후 다시 나가 호객행위를 계속했다. 아마도 그들은 호객행위만을 위해 고용된 스태프 같았다.
한참을 구경하며 맥주를 마시던 나는 약간의 맥주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호객했던 직원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했지만, 너무 바빠 보여 그냥 일어섰는데, 옆집 호객 알바가 나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대신해 줬다.
나도 그녀에게 웃으면서 "바이~ 씨 유 어겐" 하고 대답했다.
카오산 로드는 정말 신기한 곳이다.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 아직 순수함이 묻어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나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 준 옆 가게에서도 꼭 맥주 한 병을 마셔야겠다는 다짐 한다. 비록 매출에 별다른 도움 안 되는 '맥주 한 병짜리' 손님이라서 호객의 보람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맥주 두 병'의 주량이 되면 다시 한번 찾아가야지.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호객 협곡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