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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Jan 14. 2023

비가 오면 세상의 목소리가 깨어난다.

비가 온다.


유리문 너머 테라스 지붕 위로 연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움직임이 보인다.

통유리 창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카페는 주변의 다른 건물에 비해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 건 없다.

건물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인 데다가 창문이라고는 정문 바로 옆의 창문과 카운트 옆으로 통하는 테라스의 유리문 밖에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자연광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안쪽으로 뻗어있는 카페 내부 구조는 때로는 동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구조 때문에 카페 내부를 밝히는 건 자연광이 아니라 약간의 오렌지 빛이 도는 조명이다.

오렌지 빛 조명. 

왠지 동굴과 어울린다. 

그 옛날 동굴을 밝히던 횃불의 색도 이와 비슷했을테니깐. 

그 특유의 분위기가 가끔은 생각나서 나는 이 카페를 찾는다.

야생의 위협을 벗어나 동굴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었던 원시시대 DNA의 발현일까.


그런 동굴이지만 테라스가 있다.

앞서 언급한 유리문을 열면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테라스는  건물과 옆 건물사이의 골목 같은 습을 하고 있다.

3~4층 높이의 두 건물 사이의 길쭉한 공간.

테이블은 5개.

바깥쪽 3개의 테이블 위에는 딱딱한 지붕이 햇볕과 빗방울로부터 테이블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 재질의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개발이 멈춘 오래된 동네에서 본 적이 있다.

나머지 두 개의 테이블은 안쪽에 있는데 파라솔이 지붕을 대신한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동굴 같은 카페 내부에서 보내지만 가끔은 테라스에 앉기도 한다.

오늘 같은 날.

비 오는 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이끌려 야외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오고 쌀쌀하기까지 한 날씨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페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히터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실내에 있다가 빗방울 떨어지는 테라스로 나오니깐 기분이 상쾌하다.

공기도, 공간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넘어온  같다.

노트북을 테이블에 올리고 전원을 켠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밖으로 나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뜨거웠던 커피가 미지근해졌다.



테라스는 텅 비었지만 야외에는 빗방울 손님이 가득하다.

커다란 파란색 차광막 위로 가벼운 빗방울들이 떨어진다.

야외 인테리어를 하면서 철거하지 않은 양철 지붕의 어딘가에서 무거운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쉼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박자라도 맞추듯이 일정한 리듬으로 굵은 소리를 낸다.

딱딱한 물체일수록 그 소리는 더욱 선명하고 경쾌하다.

평소에는 날카롭고 삭막하게만 보였던 존재들이 비 오는 날은 가장 감성적인 소리를 낸다.


똑. 또똑. 똑똑.


마냥 차갑고 딱딱하게만 보였던 도시의 오래된 존재들이 이렇게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 들을 순 없겠지만, 그 중에는 딱딱한 외모만 보고 자신들을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섭섭한 마음도 담겨있는 듯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 들을 순 없겠지만, 그 중에는 딱딱한 외모만 보고 자신들을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섭섭한 마음도 담겨있는 듯하다.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다를 계속 듣고 있으니 이것이 빗방울의 소리인지, 부딪히는 물체가 내는 목소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이렇게 땅 위의 무생물에게 목소리를 가져다준다.

너무도 건조한 세상을 사느라 갈라지고 말라버려 결국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모든 존재들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시원한 한 모금의 물이 된다. 래서 비가 내리는 동안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다.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서로의 안부을 나눠야 하니깐.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인어공주가 생각난다.

만약 인어공주가 지금 이 빗방울에 닿았다면 마녀에게 빼앗겼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목소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면 그토록 사랑했던 왕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물방울이 되어 사라질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아주 꼬마였을 시절. 인어공주의 마지막 엔딩을 볼 때마다 늘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인어공주가 물방울이 되어서 슬펐던 건지, 왕자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사라져서 슬펐던 건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물방울이 되어 사라지던 인어공주의 모습과 동시에 슬펐던 감정만은 그대로 기억에 남아있다.


다정했던 빗소리가 갑자기 이전과 다르게 들리는 거 같다.


커피는 이제 완전히 식었다.

더 차가워지기 전에, 남은 커피를 한숨에 다 마셨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는다.

이 정도면 비 오는 날의 카페테라스는 충분히 즐긴 듯하다.

이제 우산의 목소리를 들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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