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유리문 너머 테라스 지붕 위로 연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움직임이 보인다.
통유리 창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카페는 주변의 다른 건물에 비해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 건 없다.
건물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인 데다가 창문이라고는 정문 바로 옆의 창문과 카운트 옆으로 통하는 테라스의 유리문 밖에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자연광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안쪽으로 뻗어있는 카페 내부 구조는 때로는 동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구조 때문에 카페 내부를 밝히는 건 자연광이 아니라 약간의 오렌지 빛이 도는 조명이다.
오렌지 빛 조명.
왠지 동굴과 어울린다.
그 옛날 동굴을 밝히던 횃불의 색도 이와 비슷했을테니깐.
그 특유의 분위기가 가끔은 생각나서 나는 이 카페를 찾는다.
야생의 위협을 벗어나 동굴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었던 원시시대 DNA의 발현일까.
그런 동굴이지만 테라스가 있다.
앞서 언급한 유리문을 열면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테라스는 이 건물과 옆 건물사이의 골목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3~4층 높이의 두 건물 사이의 길쭉한 공간.
테이블은 5개.
바깥쪽 3개의 테이블 위에는 딱딱한 지붕이 햇볕과 빗방울로부터 테이블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 재질의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개발이 멈춘 오래된 동네에서 본 적이 있다.
나머지 두 개의 테이블은 안쪽에 있는데 파라솔이 지붕을 대신한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동굴 같은 카페 내부에서 보내지만 가끔은 테라스에 앉기도 한다.
오늘 같은 날.
비 오는 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이끌려 야외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오고 쌀쌀하기까지 한 날씨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페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히터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실내에 있다가 빗방울 떨어지는 테라스로 나오니깐 기분이 상쾌하다.
공기도, 공간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 같다.
노트북을 테이블에 올리고 전원을 켠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밖으로 나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뜨거웠던 커피가 미지근해졌다.
테라스는 텅 비었지만 야외에는 빗방울 손님이 가득하다.
커다란 파란색 차광막 위로 가벼운 빗방울들이 떨어진다.
야외 인테리어를 하면서 철거하지 않은 양철 지붕의 어딘가에서 무거운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쉼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박자라도 맞추듯이 일정한 리듬으로 굵은 소리를 낸다.
딱딱한 물체일수록 그 소리는 더욱 선명하고 경쾌하다.
평소에는 날카롭고 삭막하게만 보였던 존재들이 비 오는 날은 가장 감성적인 소리를 낸다.
똑. 또똑. 똑똑.
마냥 차갑고 딱딱하게만 보였던 도시의 오래된 존재들이 이렇게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 들을 순 없겠지만, 그 중에는 딱딱한 외모만 보고 자신들을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섭섭한 마음도 담겨있는 듯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 들을 순 없겠지만, 그 중에는 딱딱한 외모만 보고 자신들을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섭섭한 마음도 담겨있는 듯하다.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다를 계속 듣고 있으니 이것이 빗방울의 소리인지, 부딪히는 물체가 내는 목소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이렇게 땅 위의 무생물에게 목소리를 가져다준다.
너무도 건조한 세상을 사느라 갈라지고 말라버려 결국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모든 존재들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시원한 한 모금의 물이 된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동안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다.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서로의 안부을 나눠야 하니깐.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인어공주가 생각난다.
만약 인어공주가 지금 이 빗방울에 닿았다면 마녀에게 빼앗겼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목소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면 그토록 사랑했던 왕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물방울이 되어 사라질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아주 꼬마였을 시절. 인어공주의 마지막 엔딩을 볼 때마다 늘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인어공주가 물방울이 되어서 슬펐던 건지, 왕자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사라져서 슬펐던 건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물방울이 되어 사라지던 인어공주의 모습과 동시에 슬펐던 감정만은 그대로 기억에 남아있다.
다정했던 빗소리가 갑자기 이전과 다르게 들리는 거 같다.
커피는 이제 완전히 식었다.
더 차가워지기 전에, 남은 커피를 한숨에 다 마셨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는다.
이 정도면 비 오는 날의 카페테라스는 충분히 즐긴 듯하다.
이제 우산의 목소리를 들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