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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Nov 24. 2022

할머니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할머니 한 분이 5~6살쯤 되어 보이는 손녀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오셨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의 한 손은 손녀의 손을, 다른 한 손은 흰색 종이 조각을 쥐고 있었다.

할머니는 카운터 앞에 서서 손녀의 손을 놓고는 두 손으로 흰색 종이 조각을 펼쳐서 읽었다.

"아이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있어요?"

"네"

"그걸로 주세요. 나 바로 저기 건너편에 사는데.. 애들이 좀 사 오라고 하네 허허.."

"네~ 가져가시는 거예요?"

"네 허허"

"3천 원입니다"

할머니는 호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세장을 꺼내서 카페 주인장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서둘러 밖의 테라스로 손녀를 데리고 나가신다.

마치 자신이 머물면 안 되는 공간에서 급하게 벗어나려는 것처럼.


카페는 할머니에게 생소한 공간이다.

특히 이 카페는 동네 카페임에도 불구하고, 인스타그램의 피드 소재가 될 만큼 트렌디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모던한 인테리어의 실내와 작은 야외 테라스가 붙어 있기 때문에 주말에는 실내와 야외를 오가며 인증샷 찍는 20대들이 많이 방문한다. 그러니 나이 드신 할머니에겐 특히나 이질감이 느껴질 지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이름도 생소하니깐 혹시라도 실수하실까 봐 종이에 적어서 조심스럽게 읽어서 주문하시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어색한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 길 건너 산다는 본인 소개와 가족의 심부름으로 오셨다는 세부사항까지 덧붙이셨다. 주문 후에는 카페 내에 빈 테이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오전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음료가 만들어지는 동안 밖의 테라스로 손녀를 데리고 얼른 나가버리셨다.

행여라도 자신의 존재가 카페라는 세련된 공간의 풍경을 흩트릴까 봐 서두르시는 듯한 모습.

 

우리 아버지도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공간은 돈이 있어도 들어가지 못하시겠다고. 마치 당신이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순간 마음 깊숙한 곳이 울컥했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에이 그런 마음 갖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돈 있는데 들어가면 되지."

하고 말했다. 마음과 다르게 높아진 목소리를 의식하고는 마지막에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할머니도 비슷한 심정으로 오셨다는 게 행동으로 다 보였다.

처음엔 할머니가 불편해하실 텐데 가족들은 왜 할머니를 카페로 심부름 보낸 걸까? 심부름시킨 가족이 살짝 원망스러웠는데, 생각해보니 오히려 할머니가 심부름이라는 명분으로라도 이렇게 방문하신 게 더 좋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명분도 없었다면 할머니는 평생 가게 앞을 지나다니기만 하시고, 그 카페는 마치 자신에겐 출입이 금지된 미지의 영역으로 영원히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공간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젊은 애들 중에도 무턱대고 들어가서 그곳의 분위기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며 남에게 피해만 주는 진상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들보단 조심스럽게 공기의 흐름을 살피시던 할머님이 훨씬 더 카페에 어울리는 분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테라스에서 놀던 아이가 들어와서

"아메리카노 다 됐어요?" 하고 질문했다. 아마도 할머니가 이번엔 '네가 들어가서 물어봐' 하셨나 보다.

"아니~ 아직.. 조금만 기다려줘"

"네~"


아이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 테라스 바닥에 깔린 하얀 조약돌을 쌓으며 할머니와 놀기 시작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유리문 너머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 가득한 할머니와는 다르게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조약돌을 쌓으며 놀고 있다. 하얀 조약돌에 반사된 햇살이 아이의 얼굴을 더욱 환하게 밝혔다.


내가 카페 주인은 아니지만, 내일도 모레도 할머니와 손녀가 이 카페에 심부름 왔으면 좋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익숙해져서 더이상 하얀 종이가 필요하지 않고, 자신이 카페에 온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긴장하지 않으실 때까지.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실내 테이블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돌아가시는 할머니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또 놀러 오세요.

할머니도 카페에 충분히 어울리는 손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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