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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Jan 03. 2023

LO.. 다음 어떤 글자가 떠오르세요?

2023년 새해 - 사진맛집의 빨간 곰돌이.

아메리카노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통유리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내 시선이 머무는 그곳.

그 풍경 속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저 정도면 사진 맛집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또다른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들을 주시했다.

한 무리당 평균 4~5장 이상은 찍는 듯.


창밖의 광장엔 사진 찍을 명소가 다양하지만 그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빨간 곰돌이로 추정되는 대형 공기인형 앞이다.

내가 앉은 위치에서는 어떤 형상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둥글둥글한 몸과 머리, 거의 1:1 비율의 머리와 몸통, 동그란 코의 측면, 프리허그라도 하려는 듯 팔과 다리를 앞으로 뻗은 자세는 곰돌이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그곳을 지나가던 행인들 중 대다수는 그 빨간 곰돌이 앞에 멈춰 서서 포즈를 취한다.

그중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170보다 크고 180보다 작아 보이는 남자.

카키색 바지와 하얀 운동화, 짙은 회색의 라운드 티, 단추를 잠그지 않은 어두운 코트를 입은 그는 다리를 벌리고 허리에 손을 올리며 한 장.

한쪽 다리를 45도 각도로 올리고 반대쪽 손을 머리옆에 가져다 대며 한 장.

한쪽 팔을 올리며 한 장.

차렷자세로 한 장.

앞으로 걸어가는 포즈로 한 장.

다시 두 다리를 붙여서 한 장.

그렇게 빨간 곰돌이로 추정되는 공기인형과 신나게 사진을 찍더니 빨간 곰돌이의 독사진을 여러 장 찍어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빨간 곰인형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광화문을 대표하는 이순신 장군도 세종대왕도 아니고 정체 모를 빨갛고 커다란 공기인형이라니.

문득 그 인형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키는 7~8미터로 추정되며 커다란 귀에 동그란 코가 돋보인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LO~'로 시작하는 영어인지 한글 자음 ㄴ(니은)과 ㅇ(이응)인지가 그려져 있는데 그 뒷자리의 글자는 내가 앉은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다.

추측해 볼까.

사실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그 뒷자리의 글자가 궁금하긴 했다.


아. 난 자본주의에 너무 물들었어.

처음엔 LOTTO의 'LO'인가 했다.

곰이 빨간색이고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대로변에 서있으니깐 로또 가게 홍보물인 줄..(새해 첫날 빌었던 소원 중에 로또 1등 당첨되게 해 주세요가 있어서 그런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분들 이어서 로또가 뭔지 모르고 찍으셨나 싶었지만, 그래도 한국사람으로 추정되는 가족들도 아이를 앞에 세워놓고 찍기도 했으니깐 로또는 아닐 듯.


곧이어 떠오른 단어.

'LOVE'

아. 이게 유력해 보인다.

어쩌면 식상할 수 있는 단어지만 LOVE라면 남녀노소, 내외국인 모두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 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나도 LOVE 조형물을 만나면 왠지 앞에서 셀카라도 찍고 싶고 사랑을 약속하는 자물쇠는 어딜 가도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달려있으며 파리의 사랑해벽도 에펠탑 못지않은 필수 관광코스니깐.


LOVE.

LO가 공기인형의 오른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깐, 곰의 안면 좌우 균형을 감안해서라도 4글자가 유력하다. 그래서 더더욱 LOVE라는 확신이 들었다.

글자의 정체를 확신하고 다시 바라보는 풍경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어디선가 나타난 외국인 커플이 빨간 곰돌이의 배에 등을 기댄 채 사진을 찍는다.

몇 장의 사진을 서로 찍어 주고 두 사람은 함께 결과물에 시선을 모으며 자리를 떠난다.

곧이어 작은 아이가 곰돌이의 뽈록 튀어나온 배 앞에 섰다.

엄마는 아이에게 포즈를 요구하며 셔터를 누른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인형의 눈이 LOVE라고 확신하며 바라보니 곰돌이와 함께 사진 찍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다 밝아보였고, 그 속에는 쑥스러워서 직접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사진 속 메시지로 대신 표현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로또라고 추측했을 때의 풍경이 무채색이었다면, 러브라는 확신으로 바라보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형형색색 컬러풀한 풍경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마치 화사한 필터를 먹인 사진처럼 숨겨져 있던 색들이 높은 채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해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은 작년보다 어려우면 어렵지 결코 희망적인 한 해는 되지 않을 거라고 예측한다. 경제는 더 어려워질 거고 월급은 줄일거지만, 일은 더 많이 하라고 한다.

개인의 삶에서 가장 밀접한 생활 요금들은 급격히 올랐고,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부는 공공기업의 상당 부분을 민영화한다고 예고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코 앞까지 다가온 기분으로 2022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암울한 뉴스만 가득했던 2022년의 마지막과 2023년의 시작.


평소 우스개 소리로 친구들에게 '아 로또 1등 당첨되게 해 달라고나 빌어야겠다' 농담만 했었는데, 올해는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새해 소원으로 로또 1등을 빌었다. 매해 건강과 가족의 행복이 소원의 전부였는데.. 급격히 변화하는 압도적인 힘에 나도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화 아바타에서 하늘사람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나비족들이 에이와에게 기도했던 것처럼.

그저 지나친 우려일 뿐, 실제로 일어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잔인한 경제적 폭격이 되어 머리 위로 떨어질때 소시민이 바랄 수 있는 건 기적 같은 일뿐인가.. 답답함이 기도를 마친 그날 밤 문득 떠올랐고 나의 짙은 블루로 뒤덮혔.


사실 로또 1등 당첨되게 해 달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물욕을 비롯한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게.

하지만,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마지막 최후의 보루(전기, 수도, 철도, 의료 민영화)가 무너지는 상황이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니지..

그러니 LO 두 글자를 보고 LOVE가 아닌 LOTTO가 가장 먼저 떠올랐나 보다.

인형의 눈에 적힌 글자가 LOVE일거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그 확신이 세상의 무채색에 색을 부여하는 순간.

나는 너무 부끄러워 카페 통유리의 블라인드라도 내리고 싶었다.




2023년 정말 심각한 위기들이 마천루의 거대한 빌딩처럼 거만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그들이 누리는 따뜻한 햇살만큼 그들의 그림자가 내뿜는 차가운 한기를 우리는 견뎌야 할 것이다.

그들의 깊고 짙은 그림자는 세상의 모든 색을 빼앗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혹독한 경제적인 재앙 앞에 버틸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으니깐.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더라도 적어도 사람들 마음속의 LOVE가 훼손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노출돼서 가장 식상할 단어일지 모르지만 식상한 단어로 따지면 '공기'만 한 게 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 곁에 존재하는 단어인데..

하지만, 그 공기가 없으면 세상의 생명체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공기가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LOVE라고 생각한다.


힘들지만, 어렵겠지만, 우리들 마음속의 LOVE만은 잃지 말고 살아갈 수 있길.

또다시 길거리에서 'LO'로 시작되는 단어를 만난다면,

부디 그대여 'LOTTO'보다 'LOVE'가 먼저 떠오를 수 있길.

2023년 두 번째 날. 어느 카페에서 당신 마음속 LOVE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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