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그리고 감사

몰아써 본 1년치 감사일기

by 지승렬

현재시간 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오후 11시 23분이다.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회사에 출근하지 않기 시작한게 11월 10일부터였으니 벌써 한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연말이 되어 벌써 한해가 끝났다는 생각보다 휴직을 한지 어느새 두달이 다 되어간다는게 더 생생히 와닿는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조급해져 있어서 그런 듯 하다.


한번은 꼭 감사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싶었다. 감사할 일이 마냥 많지만은 않았던 올해. 아니 더 솔직히, 화나고 욕하고, 분노하고, 억울한 순간들로 더 가득했기에. 그럼에도 올해 내가 배운 건, 감사는 감사 할 일이 생겨서 하는게 아니라, 의지이자 선택이라고 했다. 심지어 성경엔 '감사하라'고 쓰여있다. 감사하면 어때, 감사가 먼저야, 가 아니라 감사하라 는 명령이다.


그래서 일부러, 더 의식해서, 뭘 감사해야 할까 중간중간 생각했다. 1년이 넘게 어떤 보고 자리에서도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길 부정하는 직장 상사를 겪으며. 맡았던 팀이 이유없이 해체되고 팀원들을 내가 권고 사직시키면 내 몫으로 몇 달치 급여를 더 챙겨준다는 말도 안되는 얘길 들으며(물론 나도 나간다는 조건이었다). 이해 할 수 없는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는데 결국 억울해도 사과해야 하는 상황의 언덕을 넘어가며. 여기서 내가 감사해야 할 것들은 뭘까 손가락 끝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눈에 새기듯 찾았다. 그렇게 한해가 지났다.


그래서 이 시점의 떠 오르는 올 한해의 감사의 내용들은 정말 정말 감사한 것들이다. 위에 써둔게 전부가 아닐만큼 참 답답하고 다시 공황이 올 거 같은 일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시간 나는 감사의 제목들을 하나씩 써내려 간다. 이 결단과 결정, 그리고 실제로 글을 쓰는 모든 행위가 감사의 의식이며, 결국 나의 모든 사고와 행동들을 바꿔 갈 것이라 믿는다.




그럼 25년의 감사, 뭐가 있었는지 써보자.



가장 먼저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대단히 의아해보이는 내용일 수 있다. 인스타에 그렇게 아이들과 화목한 모습의 영상과 글들을 올리는데, 아이들이 예뻐보이기 시작했다니. 근데 사실이다. 2020년 12월 아내의 죽음 이후 나는 아이들을 이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됐다. 혼자가 된 내가 너무 억울해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싶지 않은 날이 태반이었다. 내 딸들을 3초 만에 웃게 할 수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아마 나 일텐데. 나는 이 의무를 저버렸다.


때로는 원망스러웠다. 아무도 모르는 오지에 숨어 자유롭게, 누구도 찾지 못하게 살아가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회사도 일도 관계도 시간도 돈도. 아이들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처럼. 아이들이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정말 죽고 못 살거 같은 아빠의 모습과 미소로 살아가지 못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 이런 나의 모습이 서서히 깨져갔다. 몇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우선은 '자유' 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자유라는 건,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닌,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상태라는 얘길 들었다. 아이들 때문에 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없어져도 아마 난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것들에 메였겠지. 그래서 내 의무를 다함으로 자유로워져보자고 사고의 흐름을 바꿨다.


그러던 중 가까운 이의 권유로 아이들과 매 달 여행을 가게 됐다. 다같이 옷을 맞춰 입고, 아이들과 함께 선택한 크고 작은 여행지를 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걸 우리는 '토.옷.놀' 토요일에 옷 맞춰 입고 놀러가는 여행 이라고 불렀다. 올해 토옷놀은 총 11편을 남겼다. 집 근처 각각의 개성을 가진 3곳의 서점을 투어했던 첫 번째 편부터, 강릉과 제주 여행, 그리고 테라스에서 했던 물놀이 등 다양한 기억들이 우리에게 남았다. 이렇게 부대끼며 시간을 보냈던 순간이 쌓여 내 마음 어딘가 숨겨져 있던 사랑의 버튼이 눌려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늘, 100% 예쁘기만 한 건 아니다. 아직도 나에게 우울함이 차오르고, 불안해지는 어느 순간들엔 아이들 얼굴조차 보기 싫기도 하다. 그러나 점차 그 주기는 짧아지고 있고, 다행히 스스로 교정 할 수 있는 자각이 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고무적이다. 온유가 너무도 해맑게 웃는 걸 보는게 행복하다. 그리고 그 웃음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지을 수 있도록 무언가 해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유하의 맑고 밝은 에너지를 지켜주고 싶다. 여전히 내가 가장 못하는 건데, 아빠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애정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의 숙제다.


과거에 아이들 엄마와 함께 했던 여행지나 장소를 셋만 가는 것이 여전히 참 괴로웠는데. 올해 셋이 다녀온 제주 여행에서 나는 그다지 힘들지 않아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들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대화하려 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건데 내 마음의 병이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갖게 된 일종의 방어기재였을까. 나는 어른과의 대화가 필요해, 아이들과는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의미도 없어 라는 생각과 인식이 있었다. 이 생각의 막대가 좌우로 툭툭, 웃음에 툭, 같은 걸 보고 대화하던 중에 툭, 서로 그림을 그리며 툭툭, 꺾여가며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완전히 잘려나갈 것이라 믿는다. 감사하다.



두번째 감사는 아빠와의 관계 회복이다.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기억을 많이 지웠는데, 아마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 대화가 되지 않는 다는 것, 꼭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아버지로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 무언가 부족한 모습들이 보였던 것,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나만 알고 있는 것들이 30년 가까이 쌓이고 쌓였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턴 그냥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며 살았던 것도 같다.


사별 이후로 처가에 2년을 더 살았고. 그 뒤 아이들과 독립해 나오며 아이들을 누군가 봐주지 않으면 내가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가 매주 월요일마다 우리집에 오셔서 금요일 밤까지 계시다 댁으로 가셨다. 그 탓에 아버지는 평일 내내 혼자 지내게 되셨다. 어머니집과 우리집 사이는 차로 1시간 반 거리다. 허리가 불편하신 엄마가 지하철을 타고 오가시는 것도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이면 아버지가 어머닐 모시고 우리집으로 오셨다. 금요일 밤엔 다시 모시고 가셨고. 그 사이 아이들이 외가에 가거나 하면 한 달에 한번 꼴로 데려다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군말 한 말씀 없이 지난 3년 간 그 일들 하셨다.


불편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내 생활이 안된다.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기꺼이 그 일들을 하시는 것들 마저 불편했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가 안나왔다. 나는 뭐가 그렇게 뿔이 나 있던 걸까.


우리 교회가 유독 좀 유난스럽게 부모님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로서는 아주 대단히 불편한 일이었다. 그런 설교도, 모임에서 관계가 회복됐다는 나눔도 매우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 기도제목을 내놓고 내 스스로는 기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올 여름 즈음 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아버지가 그 옛날 나에게 했던 일들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면 내가 용서를 해야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나한테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구체적 사건들이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난다. 내 안에 어떤, 무언가가 아버지는 내게 잘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놓고 그런 사람이라 믿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주일 교회에서 대단히 이질적인 단어 하나를 들었다. 'sonship'.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사전적으론 자식의 신분 정도로 해석되지만, 그 날의 주제는 아들됨이었다. 그리고 내가 온전히 아들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해 관계가 잘못된 것에 대해 아버지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게 바로 선쉽의 핵심이라며.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고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종종 강원도 양구로 낚시를 다니셨다. 한달에 한두번은 꼭 가셨던 것 같다. 내가 지금의 유하보다도 더 어렸던 5살 부렵부터 아버지와 낚시를 꾸준히 다녔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두번은 더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에겐 아들과 하는 낚시에 대한 큰 기대와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낚시를 다녀오시면 붕어를 몇 마리 잡았고, 몇 센치였고,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거의 듣는 척도 안하고 넘겼다. 너 혹시 시간되면 아빠가 싹 준비할테니 한번 .. 하며 흘리는 말로 얘기하시는 걸 매번 모른 척 했다.


그러다 올해 꽤 긴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갑자기 낚시하러 같이 가자고 말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올해 했던 선쉽과 아들됨에 대한 이야기들과 기도,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를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는 가까운 이와의 대화, 내가 알 지 못하는 누군가의 기도 등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내가 내 의지로 마음먹고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둘이는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아, 어머니와 아이들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근데 일정상 그게 어려워져서 결국 아버지와 둘이 가야하는 상황이 됐고.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를 불편해 하는 걸 아니 그냥 다음에 가라고 아버지에게도 얘기했는데,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내가 그냥 가자고 말을 했다. 지금도 내가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낚시를 가는 당일 아침까지도 나는 가지 말까 고민했다. 아마도 내가 믿는 신이 내 안에 그 마음을 넣으셨을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선한 생각은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오후 3시가 됐다. 출발 할 시간이다. 아버지 차에서 내 차로 짐들을 다 옮겨 실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조수석에 아버지가 앉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빠가 어제 너랑 낚시간다고 생각하니 설레서 잠이 안왔어.' 이 한 마디에 나는 지난 30년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미움, 원망, 불만, 답답함, 불신, 분노 같은 거절의 감정들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집에서 양구 낚시터까지 2시간 반 정도 거리다. 그 시간 속에 아버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했다. 그간 밀린 얘기도 있고, 별 쓸데 없는 얘기도 했다. 밤낚시였고, 아빠와 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았기 때문에 밤엔 얘길 거의 못했다. 그치만 낚시를 할 수 있게 준비를 하고, 고기를 잡으면 와서 바늘을 빼서 담고, 본인은 몇 마리 못 잡는 상황에 니가 손맛을 봤으니 그걸로 됐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내 편인 아빠를 만난 거 같았다. 살면서 어느 시점 이후 나는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외톨이라 생각하고 지냈다. 부모님께, 집에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거라 다짐했고, 실제로 내 기억에 두번(한번은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잘못, 또 한번은 결혼)을 제외하곤 크게 손 벌린 기억이 없다.


이런 마음으로 살다 결혼을 했고 새로운 가정이 내 가정의 전부라 생각하고 믿었다. 그러다 그 모든 걸 잃고 나서,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내게 위로나 마음의 안식이 될 수 없다 생각하고 온 갖 벽을 세웠다. 그리고 그 벽이 드디어 서서히 허물어 지는 것 같다. 어쩌면, 거의 확실하게. 나는 이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올해의 이 시간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이 날 이후로 나는 아빠가 편해졌다. 아빠도 그러신 것 같았다. 이후 한번의 낚시를 더 다녀왔다. 아마 겨울이 오지 않았더라면 한번 쯤 더 갔을 것도 같다. 두번째 갔을 땐 나도 아빠도 조금은 어색했지만 오가는 길에 서로에게 죄송하고 미안했다는 얘길 할 시간도 있었다. 그런 시간들이 참 감사했다.


초등학교 때 까지 누가 나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어보면 나는 늘 아버지라 답했다. 내가 왜 아버지라고 답을 했는지 최근까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참 슬펐고, 그냥 이유없이 아빠니까 그랬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와 관계 회복 이후 나는 그 이유가 생각이 났다. 그건 아버지의 성실함 때문이었다. 어릴 때도 지금도 아버지는 참 성실하시다. 피곤하실 법도 한데 엄마를 오며가며 모시러 오시는 것도 그렇고. 그보다 더 큰 건, 매일 아침 몇 년 째 하루도 거의 빠뜨리지 않고 문자로 보내주시는 기도문도 있다.


매일 새벽 일어나 묵상과 기도 후 기도문을 써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내신다 한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리 못 잡아도 5,6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관계가 좋지 않을 땐 사실 이 문자도 대단히 불편했다. 솔직히 읽지도 않았다.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아빠로 다시 만나게 된 이후, 이 기도문이 읽힌다. 때로 공감도 하고 감사도 하고 기도도 한다. 아버지의 성실함과 교회의 장로로서의 영적인 권위가 인정이 되며, 다시 존경심이 밀려왔다.


이게 글로 이렇게 쉽게 써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기적에 가깝다. 아니 기적이다. 그래서 올해 가장 감사한 일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일이야 말로 선물과 같았다. 내가 뭘 애써서 회복된 게 아니라서 그렇다.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아빠라서, 육체의 아빠를 다시 주신 것 같다. 내가 그게 늘 와닿지 않았었다. 하나님 '아버지' 라는 표현이. 나에게 가장 좋은 걸 주시는, 가장 선한 존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그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감사하다.



세번째 감사부턴 다른 글에 다시 써야겠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많이 길어졌다. 세번째 감사는 사랑에 대한 것. 그리고 자립에 대한 것. 그리고 재정에 대한 사고의 전환들.


또 이렇게 집중해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글 쓸 수 있어서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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