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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위로를 위로해

by 일야 OneGolf

우리는 간혹 비교 대상이 아닌 것들을 비교하면서 위로를 추구하곤 하지.
예를 들어, 몸이 고통스러운 게 나을까, 마음이 괴로운 게 나을까 같은 생각들 말이야.

이런 비교는 사실 객관적인 답을 찾으려는 건 아니야. 오히려 "지금 내가 겪는 것이 덜 나쁘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시도에 가까운 것 같아. 이는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이고, 회피하거나 견디려는 생존 전략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런 비교 자체가 본질을 흐리기도 하지.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은 사실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깊이 얽혀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단상이 왜 필요할까?
아마도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감정을 정리하며,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본능 때문 아닐까 싶어.

어쩌면 이런 단상은 혼란을 견디기 위한 도구가 될지도 몰라.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함 속에서, 단상을 통해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되는 거지.
그리고 이런 단상은 내면의 균형을 찾게 해주기도 하는 것 같아. 몸과 마음의 고통이 서로 불균형하게 다가올 때, 그것을 비교하고 상대화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거지.
때로는 단상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기도 해.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지금의 고통을 넘어서, 내가 왜 이런 상태에 처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거든.
어쩔 땐 이런 단상은 타인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해. 나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고립된 듯한 아픔이 조금은 희미해지기도 하잖아.

결국, 이런 단상은 혼란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세우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어.
삶은 무질서하고, 고통과 감정은 객관적 기준 없이 다르게 다가오지만, 그 안에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작은 틀을 만드는 거야.

"완벽하진 않지만 괜찮아"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런데... 위로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일까?
어쩌면 위로는 스스로에게 숨을 돌릴 기회를 주는 연민의 순간, 혹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선일지도 몰라.


"지금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베푸는 작은 사랑이자 관대함이겠지. 하지만 위로가 항상 관대함인 건 아닐지도 몰라.
때로는 고통을 직면하게 하며, 성찰과 성장을 촉구하기도 해.

예를 들어, "네가 틀렸어, 하지만 바꿀 수 있어"라는 위로는 관대함이라기보다는 나를 바로잡는 과정이겠지.

그래서 위로는 관대함일 수도 있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엄격함일 수도 있어.
중요한 건, 그 위로가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방식으로 작용하느냐는 거야.

위로는 결국, 혼란 속에서 나만의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통해 고통을 견디고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 과정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곧, 스스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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