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최전방 야산.
일단의 군인들이 산허리에 모여 있다.
그들은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려 한다.
그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A 씨.
A 씨는 예하 지휘관 B와 C에게 각각 진지로 사용할 호(壕)를 파도록 임무를 부여한다.
B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좌측 독립 소나무에서 우측 바위까지 교통호를 구축하라.”
간단한 지시였다.
A는 그 말만 남기고 C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른 장소에 도착한 A는 C에게 말했다.
“이곳에 진지를 구축할 건데,
화력이 집중되어야 할 곳은 저 전방의 삼거리 지역이다.
좌측은 저 능선 하단부 이 위치에,
우측은 나무가 없어 노출되니 엄폐가 가능한 둔덕 뒤편에서 삼거리가 보이도록 하고,
중앙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각각 3인용 호를 파라.
깊이는 최소 1.2미터, 가슴 정도의 깊이로 하고,
각 호의 전방 사선에 방해되는 나무는 제거하되
수풀은 위장이 될 수 있게 최대한 유지하라.”
지시는 구체적이었고, 설명은 길었다.
임무를 부여한 A는 다시 이동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수행 인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B에게는 간단히 위치와 임무만 주셨고,
C에게는 매우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A는 잠시 생각하더니 수행 인원에게 말했다.
“B는 이미 이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울지를 여러 차례 훈련을 통해 경험했기에 병력과 화력이 이곳에서 어떻게 운용될지를 이해하고 있다.”
잠시 말을 멈춘 뒤 A는 시선을 산 아래로 돌렸다.
“그는 지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전개될 상황을 그릴 수 있어.
어디가 사각인지 어디를 연결해야 하는지
호의 깊이는 산의 경사도에 따라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를 스스로 판단할 정도가 돼.
그렇기에 나는 위치와 임무만 준 거야.”
그리고 이어 말했다.
“반면에 C는 이 지역이 처음이다.
그리고 C가 위치한 이곳은 교통호를 구축하기에는 지면 상태가 거의 불가능한 바위와 자갈 지역이다.”
A는 발로 바닥을 한 번 차 보였다.
단단한 암반 위에 얕게 흙이 덮여 있을 뿐이었다.
“목적만 말해주면 C는 아마도 처음 지시한 그대로 직선으로 파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암반을 만나면 멈추거나 시간을 허비하거나
불필요하게 병력과 시간을 소모할 가능성이 크지.”
수행 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A는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파라’고 하는 것보다는
왜 그 위치인지
왜 그 깊이인지
왜 나무는 베되 수풀은 남겨야 하는지를 설명해 줌으로써
그가 다음번에는 설명이 없이도 상황에 부합하는 판단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시라는 것은 일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설명은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지.”
같은 임무였지만 지휘는 달라야 한다.
좋은 리더는 일을 나누기보다는 판단의 기준을 나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기준이 쌓일수록 지시는 점점 짧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