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습관은 대개 거창한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불편이나 반복된 생활 속에서 조용히 몸에 배어든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습관이었음을 알게 될 뿐이다.
나는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흘러나오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의 물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샘에서 물을 길어 오거나 집 앞의 물펌프를 이용해야 했다. 펌프는 손잡이를 움직인다고 곧바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물 한 바가지를 펌프 속에 부어 넣어야 했다. 그리고 그 물이 밑으로 빠져버리기 전에 서둘러 손잡이를 위아래로 움직여야 했다.
처음에는 헛바람만 올라왔다.
몇 번을 더 움직이다 보면 손잡이가 점점 묵직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땅속 깊은 곳에서 끌려 올라온 물이 철제 주둥이 끝에서 힘 있게 터져 나왔다.
그때 우리는 큰 대야와 항아리를 가져다 놓았다. 물이 나오는 동안 최대한 많이 받아 두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물을 다 쓰고 나면 빈 대야와 항아리를 다시 채워 두었다. 다음 사람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새벽이면 들로 나갔다. 정확히 몇 시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늘 날씨 방송이 흘러나왔다.
대화퇴어장이 어떻고 서해 5도, 백령도 같은 지명이 들리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는 그 말들의 정확한 뜻을 몰랐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들에 나가면 먼저 논과 밭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밤새 별일은 없었는지 살피고, 오늘 해야 할 일을 가늠해 보는 시간이었다.
들에 나갈 때면 늘 지게를 지고 나갔다. 지게에는 두엄이나 필요한 것들을 실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논두렁에서 풀을 베어 지게에 실었다. 집에서 기르던 소에게 먹일 풀이었다.
그 시절에는
빈 지게를 지는 일이 없었다.
가는 길에는 일을 싣고 나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또 다른 일을 싣고 돌아왔다.
그렇게 하루가 채워갔다.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 먹일 여물을 끓이는 일이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으면 불길이 금세 살아났다. 장작이 타오르며 붉은 불빛이 아궁이 밖으로 번져 나왔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다 보면 어느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은 따갑고 볼은 뜨거웠지만, 가마솥 속에서 여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묘하게 고요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궁이 앞의 시간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던 것 같다. 불은 서두른다고 타오르는 것이 아니었고, 또 너무 세게 타오르면 금세 꺼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지켜보는 시간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채에서 생활했다. 본채 옆에 떨어져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그곳은 어린 나에게 조용한 세계 같은 공간이었다.
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빈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조금씩 배워 갔던 것 같다.
들판은 또 다른 스승이었던 것 같다.
봄에는 싹이 올라왔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졌고
가을에는 곡식이 익어 갔다.
그리고 어느 날이 되면 과실이 떨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라는 것도 자연의 일이고 떨어지는 것도 자연의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감나무에 올라 홍시를 따다가 가지가 부러지며 떨어진 적도 있었다. 겉으로 단단해 보이던 가지가 의외로 쉽게 부러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무엇을 하든 먼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시골의 밤은 깊고 짙었다.
어떤 날은 코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야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어둠은 보이지 않아도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 그리고 더 잘 보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알게 해 준 것 같다.
비가 오는 날이면 흙마당인 안마당과 바깥마당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평소에는 멀쩡해 보이던 곳들이 비가 와야 드러났다.
그럴 때면 그곳을 다시 고쳤다.
삶에서도 어려움은 비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맑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가 와야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디가 약한지
어디를 손봐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비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삶의 많은 습관들은 그렇게 만들어졌나 보다.
물펌프 앞에서 배우게 된 준비하는 습관
들판에서 배운 순리
어둠 속에서 배운 담대함
비 오는 마당에서 배운 삶의 정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에는
짊어지는 일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까지
조금씩 익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