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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닙 Sep 21. 2021

나의 나침반

Lisbon, Portugal 06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될 때, 나침반은 어려운 것 없다는 듯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런 나침반 없이 스스로 당차게 방향을 고를 수 있다면, 그건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의 길이 된다. 


열일곱 살, 고등학생 때 혼자 일본에 간 적이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고, 처음 떠나는 해외였다. 무슨 바람이 든 건지 홀로 여행을 하고 싶었고 대책 없이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떠나는 날 이른 새벽, 부모님께서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어둡고 텅텅 빈 도로를 지나가며 나는 꽤 겁이 났던 것 같다. 괜히 간다고 했던 걸까? 막상 가려니 기대감보다는 막막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정말 아는 거 하나 없이 부딪치는 거였으니까.


긴장이 톡톡 묻어난 얼굴로 부모님과 인사를 나눈 후, 출국심사장으로 들어갔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는 등 모든 처음의 경험에 묘한 흥분과 긴장이 범벅되어 있었다. 무사히 간사이 공항에 도착해서 게스트 하우스로 향하는 길.  튼튼한 보호대를 착용한 것처럼 자신감이 솟았다. 오꼬노미야끼 맛집에도 찾아가고, 오사카 거리 곳곳을 활발히 걸어 다녔다. 하지만 묘한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마주한 것은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혼자서 밥을 먹고, 낯선 길을 찾아다니는 순간 사이사이에는 낯선 감정이 스며들어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밤거리를 걷다가 신발이 푹 젖기까지 했다. 복잡한 번화가의 소음들, 몽땅 축축해진 양말이 내 기분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난 여행을 하면 모든 순간이 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겪고 있는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어린 생각이었지만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교토로 향하기 전 작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고르고 있었다. 우리나라 편의점에는 없는 독특한 맛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신기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 한 개와 패키지가 귀여운 음료를 골라 계산했다. 상냥한 점원과 인사를 나누며 음식이 담긴 봉투를 들고 기분 좋게 편의점을 나왔다. 분명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의 감정은 평범하지 않았다. 작은 행복에 가까웠고, 막혀있던 알맹이가 ‘톡’하고 굴러 나오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림 같은 이상과 소박한 현실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나를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 될 수 없다. 실은 그 시간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그 속을 촘촘히 메우며 행복을 닮아가는 것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상점 거리를 지나며 작은 생각을 되뇌었다. 그저 이 순간을, 선물 같은 오늘을 즐기자는 것을. 조용한 거리, 개성 있는 간판들, 주변의 소음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했고, 그 순간부터 진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언니들과 걸었던 교토의 밤거리. 만화에 나올 것만 같은 식당에서 먹은 끝내주게 맛있는 카레 우동. 반짝이는 디저트를 즐겼던 순간들. 지금 돌아봐도 너무나 선명히 떠오르는 소중한 추억이다. 


어린 날의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양분이 되었다. 이 경험에서 용기를 얻었고, 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후에도 혼자 경주를 여행하며,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러한 시간의 흔적은 이번 여행도 용기 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금보다 어린 나에게 받은 고마운 선물. 나의 나침반은 내 경험의 부산물로 짜일 수 있도록, 피하지 말고 부딪치자. 새로운 방향들 속에서도 단번에 걸어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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