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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닙 Sep 16. 2021

다분히 빠져본다는 것

Lisbon, Portugal 05

Lisbon, Portugal 05 _ 다분히 빠져본다는 것



사그레스 맥주 한 캔과 은박에 쌓인 동그란 초콜릿 과자. 당장 눈앞에 펼쳐진 솜사탕 같은 일몰. 온 주위를 근사하게 물들이는 말랑하고 따스한 빛. 오늘도 해 질 무렵 산타루치아 전망대에 찾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초점마저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듯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자 거리에는 오렌지빛 조명이 곳곳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낮에 벼룩시장에서 만난 언니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가 그리웠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다. 더구나 낯선 사람과의 식사라니, 더욱 기대되는 일이다.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으로 찾아갔다.


골목 사이에 있는 아담한 식당에서는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아 먼저 예약을 하고, 근처 공원에서 기다렸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는 기꺼이 우리들의 간이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나름의 분위기를 가진 작은 분수대가 있었고, 그 가까이에는 사람의 온기가 도는 노천 식당이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동네 주민들은 간단한 맥주 한 잔에 싱싱한 대화를 안줏거리 삼고 있었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의 어색함을 가라앉히고 있을 즈음, 식당 문이 열렸다. 내부의 훈훈한 온기는 쌀쌀한 날씨에 한껏 움츠린 몸을 녹여주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는 여섯 개의 테이블이 있었고, 곳곳에 놓인 조명이 포근함을 더해주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차자, 불분명한 대화 소리가 겹쳐지며 차분한 배경 소리를 만들어냈다. 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웨이터가 건네어 준 메뉴판을 보며 어떤 메뉴를 시킬지 고심했다. 취향이 비슷했는지 흔쾌히 결정이 났는데, 뽈보, 라자냐, 게살 리조토, 그리고 샹그리아 한 병을 주문했다. 곧 테이블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례로 놓였고, 비주얼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했다. 대화를 곁들이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그럼 우리 근처에 있는 재즈바에 갈까?”

“좋아!”

한 언니의 발랄한 제안을 덥석 물었다.


재즈바의 열린 문으로 흥이 벌써부터 삐져나오고 있었다. 잔뜩 부푼 기대감을 안고 들어가니 2층으로 이루어진 그 공간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나름 앞쪽에 자리를 잡고 와인을 주문했다. <Ain’t no sunshine>, <Valerie>, <Creep> 등 좋아하는 곡들이 눈앞에서 생생히 연주되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한 여자는 이미 음악에 흠뻑 젖어 들어 있었는데, 탱글탱글한 곱슬머리에 순수하게 달아오른 미소가 얼굴 전체에 퍼져있었다. 휘황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표출하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마음과 몸짓이 자유로워졌다. 추운 겨울에도 배꼽티를 입은 사람, 두툼한 호피 무니 코트를 걸친 사람, 연두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독특한 피어싱을 한 사람.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낸 이들에게서는 정제되지 않은 멋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러한 차림들을 과감하다고 여겼을 테지만, 그런 용감한 태도들은 사실 당연한 비침이 아니었을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개성을 표현하고 즐기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당연한 선택일 뿐이다. 적어도 태도에 있어서 옳고 틀리다의 기준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고, 그 기준은 어떤 가치를 받아들이냐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 판단의 틀을 고정시키고 싶지 않다. 유연하게, 말랑말랑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떠들썩한 공간 속, 우리는 취기가 더해진 채 대화를 나누었고, 재밌어 죽겠다는 듯 익살맞은 표정도 지었다. 멋진 순간을 또 하나 발견했다. 이렇게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과 반짝이는 빛을 차곡차곡 모아가야지. 같은 순간은 다시 오지 않고, 같은 감정 역시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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