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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닙 Sep 16. 2021

느슨한 행복의 흔적

Lisbon, Portugal 04

Lisbon, Portugal 04 _ 느슨한 행복의 흔적



코르메시우 광장 앞 해변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나의 오른쪽에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와 햇볕에 달구어진 모래사장이, 왼쪽에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천천히 지나다녔다. 그사이 나는 돌 위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는 기분 좋은 소음이 되었고, 청명한 파도 소리는 맑음을 더해줬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사실 나와 그녀는 아까부터 꽤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기에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붉고 기다란 곱슬머리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참 매력적이었다. 시를 쓰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냥 별거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누구한테 보여주기도 민망한, 그저 투박한 문장의 나열일 뿐이었다. 궁금해하는 그녀의 시선은 공책을 향했고 커다란 두 눈으로 흥미롭게 바라봤다. “I like your alphabet!" 한글을 모르는 그녀에게 이리저리 흩날려진 글씨가 매력적으로 보였나 보다. 호기심 어린 두 눈을 보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고, 조금 더 마음을 열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녀는 1년 전 우연히 리스본으로 왔는데, 여기가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단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머물고 있다니. 그녀의 용기가 멋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를 향한 스스럼없는 칭찬이 오갔고, 우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다가, 그녀가 좋아한다는 영화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다. 언제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간직하고 싶은 제목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노트를 건네며 제목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흔쾌히 노트를 받아들였다. 오로지 내 생각과 감정들로 채워진 작은 노트에 낯선 이의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보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이 아닌가. 우연이 이루어준 신기한 만남은 소소한 재미를 안겨줬다. 이후 우리는 여느 여행자의 만남이 그러하듯 고마움과 아쉬움이 새겨진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골목길을 걸으며 잔잔하게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겨 보았는데, 그 속에는 분명 느슨한 행복이 뭉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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