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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겨울섬 Jun 11. 2021

길었던 프롤로그를 닫으며

르퓌길을 걷다 1. Le Puy-en-Velay > Montbonnet



 2018년 3월 22일 목요일, 순례 첫째 날








 오늘도 캄캄한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갈 채비를 마치고 여명이 밝아오길 기다렸다. 창문을 열고 총총이 뜬 별을 사진으로 찍어보았지만 다 담기지 않았다. 몇 번이나 셔터를 더 눌러보아도 마찬가지여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창가에 기대어 소리 없는 반짝임을 두 눈에 담았다.

 빛나는 별에 나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겹쳐졌다. 언제까지고 내 삶에 머무를 줄 알았던, 내 안에 드리운 그늘을 환히 비춰주리라 믿게 했던, 잃고 싶지 않아서 애가 타던, 이제는 사그라든 빛.

 깜박깜박. 또다시 별빛이 신호를 보냈다. 어제부터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창밖으로 귀를 기울이듯 몸을 내밀자,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반짝임으로 말했다.

 

 삶의 모든 순간은 수많은 찰나가 모여 이룬 거야. 찰나를 붙잡을 수는 없지. 별이 지고 꽃이 시들고 향기가 흩어지듯이 모든 것은 지나가.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려 숨차게 달려가지 말고 그저 네 삶의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해 지나가는 것들을 사랑하길. 피어나기 전의 꽃봉오리도, 찬란한 절정의 별빛도, 점차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향기도. 결국 그 반짝이는 찰나가 모여 너의 삶은 이룩되니 네 곁에 없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그리고 다행이지 않니. 숨 막히는 괴로움도 조금 긴 찰나일 뿐, 언젠가 지나가리라는 게.









 이틀 전 나를 맞이했던 할아버지 신부님에게 열쇠를 건네고 동이 터오는 거리로 나왔다. 대성당에서 아침 7시 반에 열리는 순례자 축복 미사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골목에 타박타박 스틱 소리가 울렸다. 대문에서 모퉁이를 고작 두어 번만 돌면 대성당인데 한 걸음 나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등산 스틱은 다 거기서 거기인 쇠막대기인 줄 알고 인터넷에서 최저가로 한 쌍에 9900원 주고 산 파란 스틱. 배송되자마자 거실을 한 번 왕복하며 써보고 연습을 안 했더니 어찌 된 게 왼발과 왼손이 함께 나가는 둥, 영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거미처럼 삐걱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가 대성당으로 이어진 계단 앞에 섰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첫 계단에 스틱을 짚었다.

 아이고.

 계단 하나 오를 때마다 자그맣게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만치 앞서 올라가던 중년 부인이 발길을 돌려 내게 와서 오른팔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따뜻한 눈빛과 말투로 보아, '부축해줄까?'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순례자도 저벅저벅 잘만 올라가시는데, 한참이나 젊은 나는 계단 초입에서 버둥거리고 있으니 생면부지의 타인에게까지 걱정을 끼칠 정도로 엄살을 피우다가 들통이 난 기분이었다. 부끄러워서 볼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다정한 부인에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한 뒤, '이것 봐요, 걱정할지 않아도 되겠죠? 하하하!'라고 전하지 못한 말을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야고보 성인상 앞 초봉헌대에는 이미 많은 기도가 불꽃으로 타고 있었다. 초값 5유로에 어제 수녀님이 그냥 주신 순례자 여권 값을 더해 봉헌함에 넣고 야고보 성인 앞에 초를 밝히고 두 손을 모았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성호를 긋고 침묵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흘렀다. 이 길을 다 걸으면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과 순례자 축복 미사를 바쳤다.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졌고, 낯선 사람들과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따뜻했다. 반년 만에 성체도 모셨다.  


 대체 어디 있냐고 가슴을 치며 메아리 없는 허공을 헤매도 부서지던 나의 세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당신. 끝내 무너지는 세계의 파편을 피해 우울의 심연에 발을 담그고 만 나는, 열렬히 바라고 매달려 본 적은 없지만 늘 나의 삶을 지탱하는 숨결이라 의심치 않았던 나의 신을 '위선자'라 불렀다.

  미사 시간마다 더 심하게 호흡이 조여 오는 증상은 저항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리 아름답던 성가와 기도문이 날 선 창이 되어 나를 찔러대며 밀어내는 것 같았다. 한 소절, 한 마디 모두 아팠다. 그래도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주먹을 꼭 쥐고 미사 시간을 버텼다. 마침 기도가 끝나고 움켜쥐었던 주먹을 펴니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붉은 낙인처럼.

 내 발로 등을 돌려 나오면서도 차갑고 딱딱한 손에 떠밀려 쫓겨나고 있다는 확신에 슬픔은 분노로 바뀌어 해일처럼 덮쳐왔다.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도 찾아 나선다더니... 모든 것이 다 위선이다. 다시는 믿음 따위 가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슬픔은 분노를, 분노는 불신을, 불신은 조롱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 모든 부정의 단어가 끝내 무관심으로 귀결되었을 때, 내 안에 밀려온 감정은 자유였다. 그 후로 한동안 자유를 만끽하며 가벼이 날갯짓하고 있다 여겼지만,  실은 물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음을, 이렇게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는 삶의 작은 파도에도 서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절망해야 했다.

 프랑스로 떠나오는 날까지도 절망에 휩싸여 있다가, 파리 행 비행을 몇 시간 앞두고 결국 새벽 미사에 갔다. 그리고 주먹을 꼭 쥐고 손바닥에 낙인 같은 붉은 자국을 만들며 고개를 떨군 채 미사 시간을 견디고, 다섯 뼘 남짓한 고해소에 앉아 서너 마디에 한 번씩 눈물을 쏟으며 힘겹게 고해성사를 이어갔다. 낯선 시장 한복판에서 서운함이 잔뜩 쌓여 서럽게 울면서도 엄마의 치맛자락은 놓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언어로 진행되는 미사는 믿을 수 없이 편안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신부님의 미사 강론은 잔뜩 힘을 주고 움켜쥔 것들을 놓아주어라 다독이는 바람 한 줄기처럼 내 귀에 불어왔다. 이를 악물듯 쥐었던 주먹을 펴고 느슨하게 기도손을 모았다.

  미사가 끝나고 미사를 집전한 신부님이 야고보 상 앞으로 순례자들을 불렀다. 둥글게 모인 순례자들 가장 뒤에 쭈뼛거리며 다가서니, 어제 순례자 여권을 건넨 수녀님이 반색을 하며 손짓하였다.

 신부님은 순례자들을 향해 각자 어디서 왔는지 한 명, 한 명 지목하여 물었다. 스위스에서 온 커플을 빼면 모두 다른 지역에서 모인 프랑스인이었다. 가장 끝에 서 있던 내 차례가 되었다. 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식은땀이 쭉 흘렀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순례자들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술렁였다.

 "멀리서 온 친구가 있었네요. 여기까지 얼마나 걸렸지요?"

 "열두 시간이요. 아... 비행기로요."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술렁이는 탄성. 나를 바라보는 순례자들의 입가에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긴장에 굳어있던 내 얼굴에도 어색하게나마 미소가 떠올랐다.

 소개가 끝나고 수녀님이 순례자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나눠주었다. 마지막 차례인 내게도 건네진 그것은 르퓌의 검은 성모상과 조가비가 앞뒤로 새겨진 작은 메달과 손바닥만 한 종이에 한글로 쓰인 축복의 기도였다. 모두 기도문을 나눠 받자 각자의 언어로 바치는 하나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 이들에게 따뜻한 날 안에 어두움이 사라지게 하시고

 밝은 빛이 어두운 밤과 피곤함을 거두어 주시며...

 

 기도에 이어 순례자들은 차례로 신부님의 축복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나의 차례가 되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부님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나지막하게 축복의 기도를 읊조렸다. 나 또한 소리 없이 기도했다.

 '부디 이해의 걸음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지금은 도보여행자로 출발할지라도 길 끝에서는 순례자로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 아멘.'








 든든하게 축복을 받은 순례자들은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기 위해 긴 계단을 내려갔다. 성당 파사드 너머  르퓌가 환하게 빛났다. 여행자로 몇 번이나 이 자리에 섰을 때는 늘 바로 아래 르퓌를 바라보며 내려갔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이 계단으로부터 이어진 길고 긴 길, 그 너머로 시선과 마음을 향하며 첫발을 뗐다.














 등에 보따리를 이고 르퓌를 빠져나가는 오르막길을 오르자니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라 열 걸음에 한 번씩 멈추어 갔다. 가뜩이나 가장 늦게 성당에서 떠났는데 걸음까지 느려서 함께 축복을 받은 순례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와 함께 걷거나 앞서려고 시작한 길이 아니니 길 위에 혼자인 게 마음 쓰이지는 않았다. 그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때마다 점점 멀어지는 르퓌가 아쉬워 자꾸 돌아볼 뿐이었다.

 멈춰서 돌아보기를 열 번쯤 할 때, 저 아래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올라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아까 함께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 중 가족으로 보였던 이들이었다.

 "안녕, 아까 함께 미사 했었지? 나는 사브리나야."

 딸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긴 우리 엄마, 아빠."

 음... 나는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외국인들은 내 이름을 말하기 어려워하던데.......

 "안녕, 나는 Lee야."

 짧은 고민 끝에 흔해서 불리기 쉬운 나의 성을 말했다.

 "부모님과 함께 걷다니 보기 좋다."

 "엄마 아빠는 나와 이틀만 걷고 집으로 가실 거야. 나는 두 달 동안 여기서 산티아고까지 갈 예정이고."

 르퓌에서 산티아고까지 1600km의 머나먼 여정을 응원하기 위해 길의 시작을 함께 걷는다는 사브리나의 부모님은 딸만큼이나 다정하고 쾌활했다.

 "한국에서 얼마 전에 동계올림픽을 했잖아. 평창! 평창이었지? 무척 아름다웠단다."

 지난달 우리나라 아름다운 산간에서 매일 감동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던 동계올림픽에 대한 덕담에 괜스레 어깨가 으쓱여졌다.

 "오늘 어디까지 갈 거니? 우리는 여기서 24km 떨어진 생 프리바 달리에에 묵을 거야."

 "잘 모르겠어. 오늘부터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거든."

 "오늘 못 보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우리는 같은 길을 걸을 테니까."

 다음을 기약하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사브리나 가족을 보면서, 다시 마주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 전 기차에서 만났던 빨간 옷 할아버지와 회색 옷 할아버지도 그렇겠지. 길을 떠난 지 30분도 안 돼서 세 시간을 걸은 듯 녹초가 되어가는 내 느린 걸음은 남들보다 적어도 하루씩은 뒤처질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한 번의 만남 이후 재회를 기대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누구와 함께 걷거나 앞서려고 시작한 길이 아니니.

 편한 잠자리, 편리한 이동 수단, 짧은 지름길, 발길을 붙잡는 풍경, 애틋한 사람... 어쩌면 욕심이 나는 이 모든 걸 스쳐지나, 산티아고로 정진해 나아가야 하는 일이 순례자의 숙제이자 운명일지도 모른다.

 까마득한 오르막길 끝에 다다르자 광활한 고원이 펼쳐졌다. 아직 겨울의 덧문이 채 닫히지 않아 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풀밭 위로 난 흙길이 저만치 완만한 둔덕을 그린 숲 속으로 이어지는 게 보였다.

 등 뒤로 점점 멀어지던 르퓌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딛고 보이는 모든 것은 나에게 새로운 길이고 풍경이다. 저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을 마주할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








 생장까지 가는 길 위의 모든 장면이 내내 환상적일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해도, 미지의 세계는 초입부터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쌓인 돌담에 삐죽이 돋아난 가시덤불, 생기 없는 나무와 고원의 풀밭, 질척이는 진흙길. 그럼에도 아직도 삐걱거리며 박자가 맞지 않는 지팡이질과 발걸음에 집중하느라 김이 샐 틈이 없었다. 배낭마저 어쩐지 몸에 착 붙지 않고 덜컹거리며 어깨를 때려댔다. 어색한 지팡이질에 금세 팔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이 정도면 그냥 걷는 게 낫지 않을까...?'

 두 팔을 지지하던 스틱을 땅에서 떼고 걸어보았다. 한결 걸음이 편해지는가 싶다가 다섯 걸음도 못가 무릎이 주저앉을 듯 욱신거렸다. 이렇게 스틱의 존재 이유를 배우고 다시 지팡이질을 시작했다.








 지팡이질이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 이번엔 어깨가 말썽이었다. 배낭에 어지러이 달린 끈을 이리저리 조절하다가 허리끈을 조이고 어깨끈을 느슨하게 하니, 어깨가 감당하던 무게감이 덜어졌다. 그러나 열 걸음도 못 가서 이번에는 허리를 찌릿하게 찔러대는 통증에 깜짝 놀라 다시 어깨끈을 조이고 허리끈을 느슨하게 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너풀거리며 달려있는 배낭끈들의 존재 이유도 알게 되었다.

 한참을 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 팔과 무릎, 어깨와 허리에 부담을 번갈아 지우며 걸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설프지만 그래도 어깨의 무게를 허리가, 무릎의 고통을 팔이 나누어지는 것을 걸음마다 배워갔다.


 르퓌를 벗어난 뒤의 길은 경사가 완만했지만 질척거리는 흙길 때문에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편안하게 한 곳에 머물렀으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 내내 따라왔다. 처음엔 황량해 보이기만 하던 고원은 겨울도 봄도 아닌 계절의 오묘하고 쓸쓸한 운치를 자아내며 깊은 사색으로 이끌었다.

 








 6km쯤 걸었을까. 르퓌를 떠난 뒤 첫 마을인 라 호슈 (La Roche)에 도착했다. 가파른 절벽을 따라 붉은 지붕을 얹은 집 몇 채와 돌담이 늘어선 작은 마을. 담 너머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며 짖어대는 셰퍼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고 돌담 옆 길가에 깨끗한 자리를 찾아 배낭을 내렸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대성당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조금 넘게 흘렀다. 보통 배낭을 메고도 한 시간에 4km 정도 걷는다고들 하던데, 나는 한 시간에 3km도 채 오지 못한 셈이다. 아무래도 오늘 생 프리바 달리에까지 가기는 무리겠지. 한 달 안에 생장까지 가는 것도 어림없으리라. 파리에 짐을 맡긴 기한을 넉넉히 잡아두어 다행이었다.

 배낭에 꼬깃꼬깃 싸온 빵조각을 꺼내서 절벽 아래 분지를 바라보며 선 채로 점심을 먹었다. 털썩 앉아도 흙이 덕지덕지 묻지 않을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해서였다. 첫날부터 더럽히기가 싫은 새 배낭, 새 등산복, 새 등산화. 이럴 때 새것이란 너무나 불편하다.









 

 저 아래 분지에는 드문드문 초록 풀잎의 군락이 돋아나 봄이 움트고 있음을 싱그럽게 알렸다. 그런대로 괜찮은 길 위의 첫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분지를 향해 아찔하게 깎아지른 언덕의 좁은 길을 따라가며, 바닥에 솟아오른 돌을 피하느라 느린 걸음은 더 더뎠다. 까마득한 과거의 화산 활동으로 불규칙하게 솟아오르고 꺼진 지형 위에 나무와 풀과 돌이 거칠게 자라난 기이한 풍경을 혼자 걷자니, 외딴 행성을 헤매는 우주인이 된 것 같았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느닷없는 외로움이 온몸에 와닿았다. 침묵이 필요했던 나에겐 오히려 기다려온 외로움이었다.

 돌담이 늘어선 오솔길을 한참 걸었다. 땅이 질어 발걸음이 무거운 것 빼고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래, 나는 나의 체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 다른 순례자들처럼 생 프리바 달리에까지 갈 수도 있겠지.


 산티아고로 가는 가장 유명한 순례길인 프랑스 길에서는 노란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요즘에야 구글 지도 어플이며 가이드북이 있어서 화살표를 놓치고도 길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아주 긴 시간 순례자들의 이정표이자 길잡이, 그리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비춰주는 등불이었으리라. 르퓌에서 생장까지 가는 르퓌길에도 그처럼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는데, 흰색과 빨강 줄무늬이다. 그건 나무로 세운 이정표에 있기도 하지만, 길가의 나무, 바위, 담벼락, 전봇대 등 순례자의 눈길이 닿을 수 있으면 어디든 그려져 있었다.

 흰 줄과 빨강 줄이 위아래로 나란히 있으면 직진, 엑스자로 교차되어 있으면 그쪽으로는 가지 말라는 뜻, 흰 줄과 빨강 줄 아래 꺾여있는 흰 줄 하나가 더 있으면 꺾인 방향으로 좌회전, 또는 우회전하면 된다.  











 눈길이 닿을 만한 곳에 내내 직진 표시가 이어지다가 다음 마을 St-Christophe sur- Doraison이 나왔다. 참전용사비가 있는 광장 쉼터 테이블에 배낭을 내리고 이리저리 몸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고도 9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 광활한 평원이 펼쳐져 있고, 마을에는 지나온 농가들과는 다르게 자갈길을 고르게 깔았다. 화산석으로 지어진 집들과 미색으로 벽을 칠한 아담한 건물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붉은 지붕을 얹었다. 평원에 반듯하게 조성된 작은 마을은 영화 세트장처럼 보일 만큼 평화롭고 예뻤다. 그 무대의 등장인물은 나 하나뿐, 오가는 사람도 하나 없어 더 평원 위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세 개의 종을 나란히 단 성당 첨탑이 보여 가보았지만 문이 잠겨 있어, 다시 쉼터로 돌아와 등산화를 벗고 의자에 다리를 길게 뻗었다.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는 광장 저편에서 노랑 줄무늬 고양이가 사뿐사뿐 다가와 나와 배낭 사이를 열심히 오가며 냄새를 맡더니, 꽤 환영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비비며 인사를 했다. 평화로운 풍경과 온화한 날씨에 고양이라니. 완벽한 휴식이 아닐 수 없다.












 그때 길 건너 하얀 집에서 백발 할아버지가 두 번째 등장인물로 등장했다. 할아버지는 허리만치 오는 낮은 나무 담장 문을 열고 나와 우체통에서 편지 몇 통을 꺼내 들고 다시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다 나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꺄페?"

 엄지와 검지를 모아 커피잔을 잡고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하고 나를 가리키는 것을 보아 이런 뜻이 분명했다.

 '거기 순례자, 커피 한 잔 갖다 줄까?'

 이 순간 커피 한 잔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양손을 입가에 모으고 대답했다.

 "Non- merci-!"

 정중한 거절의 말이라 익혀온 프랑스어.

 이때부터 나는 '농 메르씨'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예의상 건넨 말일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에, 가끔은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으로 습관처럼 '고맙지만 괜찮습니다.'라는 말로 많은 진심들을 거절했다. 돌아보면 후회스럽다. '농 메르씨'  그 말 대신 조금의 뻔뻔함이면, 호의를 건넨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순례 첫 날로 돌아가 낮은 담장 너머로 따뜻한 커피 한 잔부터 얻어 마실 테다.

 한참 내 곁에 머물던 노랑 고양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광장을 가로질러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여유롭게 쉬었으니 다시 길을 나설 차례. 얼마나 왔는지 보려고 미암미암도도를 꺼냈다. 보나 마나 꽤 멀리 왔겠지!

 그러나 20km 가까이 왔을 거라는 나의 자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르퓌에서 여기까지 온 거리는 12km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생 프리바 달리에까지 가려면 지금껏 걸어온 거리만큼 더 가야 했다. 라 호슈에서 걸어오며 끝도 없이 계속된다 생각했던 오솔길이 겨우 3km 밖에 되지 않았다니!












 서툰 걸음에도 시야의 경관에 부지런히 눈길을 주던 여유는 사라지고 고행의 길이 시작되었다. 남은 거리와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간의 숫자에 쫓겨 너른 평야와 시냇가와 평화로운 농가를 다급하게 지나쳤다. 양 옆에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길 가운데에는 물이 잔뜩 고인 좁은 길이 나타났을 때는, 여기가 길이 맞긴 한 건지 의심해 봤지만 나무 이정표 위의 르퓌길 두 줄의 표식은 분명히 거기로 향해있었다. 다리를 시옷자로 벌리고 마른자리만 디디며 한참 진땀을 뺐다.











 가시나무 길을 빠져나오고서도 마음만 바삐 느린 걸음을 재촉했다. 길이 더 험해진 것도 아닌데 숨은 점점 가빠지고 등에 멘 배낭은 걸음마다 주먹만 한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돌탑이라도 된 듯 점점 어깨를 짓눌렀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몸을 스틱에 의지해 끌고 작은 농가 마을을 벗어나자,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가로수길 끝에 생 프리바 달리에 전 마을인 몽 보네 Montbonnet 가 보였다.

 프랑스어로 산이라는 뜻의 mont이 붙은 이름답게 봉긋이 솟은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 미암미암도도의 정보에 따르면, 저기 보이는 스무 채 정도의 붉은 지붕들 가운데 내가 묵을 수 있는 지트는 단 하나였다. 마을에 지트와 고급 민박인 셩브흐도트가 하나씩 더 있었지만, 다른 지트는 4월에서 10월까지만 문을 열고 셩브흐도트는 하루 숙박비가 평범한 지트의 세 배가 넘었다. 하루에 얼마나 걸을지 짐작할 수 없어서 당장 오늘 묵을 곳도 정하지 않고 가는 길. 모든 것은 운명이 이끌어주리라는 거창한 모험심이 아니라,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대책 없는 무모함으로 몽보네를 향해 나아갔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한달음에 닿을 것만 같던 몽보네는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던 가시나무길을 통과할 때보다 고지가 앞에 보이는데 제자리걸음처럼 닿지 않는 지금이 더 절망적이었다. 무거워지는 걸음만큼 길게 기우는 나무 그림자만 내려다보며 힘겹게 걷는데 길가에 작은 성당, Chapelle Saint Roch가 보였다.











 그 역시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였던 14세기 프랑스 출생의 호슈 성인은, 순례 중 치유의 은사로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고 한다. 그 생애를 증거로 병자와 순례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르퓌길을 걸으며 그 이름을 딴 성당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성당들은 하나 같이 작고 소박하게 길가를 지키며 순례자들이 쉬어갈 쉬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몽보네를 코앞에 두고 만난 성 호슈 성당도  문은 잠겨있지만 앉아서 쉴 수 있는 돌담과 나무 그늘이 넓게 드리운 작은 마당이 있었다. 그늘 아래 어깨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초조한 마음을 다독이자, 이마를 스치는 산들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쏟아지는 햇살이 느껴졌다. 배낭 옆주머니에 꽂아놓은 물병의 얼마 남지 않은 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힘을 내 걸어서 드디어 몽보네 어귀에 들어섰다.













 흰 몸에 까만 숄을 두른 무늬의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왔다. 내 앞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는 호박색 눈이 따뜻하게 빛났다.

 "그래, 나도 반가워."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마을의 문을 연 하나뿐인 지트, Gite d'etape prive l'escole을 찾아 골목들을 기웃거렸다.

 작은 마을이라 금세 찾은 지트의 붉은 철제 대문에 오후 3시에 문을 연다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3시 40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안심하고 문을 두드려 봤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른침만 삼키다가 대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이 쓱 열렸다. 오픈 시간 아래 적혀있던 Free Place라는 문구에 기대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에 테이블과 나무 벤치가 있었다. 벤치에 짐을 내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주인장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오늘 주인장이 어디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마당에서 침낭을 지붕 삼아 자야 하나? 다른 지트에 가볼까? 아님 생 프리바 달리에까지 6km를 더 가볼까?

 어깨의 무게는 내려놨어도 초조한 마음은 덜어내지 못한 채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다른 방법들을 탐색해 봤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다른 지트는 4월 오픈을 준비하며 대청소하는 기간이라 숙박이 불가하다 했고, 생 프리바 달리에로 가는 길은 너른 평야 너머로 산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이런 걸음으로는 아마 저 산을 다 넘기도 전에 어둑해지겠지.

 오늘 밤 차선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배낭을 내려놓은 그 지트 만이 나의 동아줄이었다. 이왕이면 침낭 속에서 새벽이슬을 맞으며 아침이 오길 기다려야 하는 두레박보다는, 주인이 돌아와서 침대맡에 짐을 풀고 따뜻하게 쉴 수 있는 두레박이 내려오길 기도했다.

 지트로 돌아가니 대문 앞에 트렁크가 열린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곧 자그마한 중년의 금발 여자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네가 저기 배낭을 두었구나. 안녕, 나는 마리란다. 혼자 왔니?"

 "네, 저는 Lee라고 해요. 오늘 르퓌에서부터 걸어왔어요. 아무도 없어서 좀 걱정하던 중이었고요."

 "장을 보고 오는 길이야. 내가 없어도 지트에 들어가 있어도 됐는데 말이야. "

 트렁크에서 짐을 마저 꺼낸 마리를 따라 마리가 사는 3층 집 바로 옆에 있는 지트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벽난로와 푹신한 소파, 커다란 탁자가 있는 응접실과 주방이 보였고, 2층에는 샤워실과 침실이 있었다. 르퓌의 신학교 숙소와는 다르게 평범한 집의 하룻밤 객이 되어 주인장의 공간을 빌려 쓰는 셈이었다. 방에 있는 여러 개의 싱글 침대 중 하나를 골라 배낭을 기대어 놓고 마리에게 하룻밤 치 숙박료를 치르고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았다.

 "저녁은 정말 안 먹어도 되니?"

 "네, 음식을 좀 가지고 있으니 내일 아침만 신청할게요."

 "그래, 여기 찬장에 빵과 차가 있어. 냉장고에서 잼과 과일을 꺼내서 같이 먹으렴. 일찍 길을 떠나면 내일 못 볼 수도 있겠구나. 좋은 밤 보내렴."

 마리 아주머니는 커피포트 사용방법까지 꼼꼼히 알려주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말한 대로 배낭에 빵이 조금 있긴 하지만 따뜻한 차 말고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안식처에 모든 짐을 내려놓은 지금, 몸의 장기들까지 더 움직이기 싫다고 벽난로 앞 소파에 드러눕기라도 한 것처럼.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잠깐 침대에 누워 쉰다는 게 눈을 떠 보니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배낭에서 파스를 몇 장 꺼내 일등으로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데부터 순위를 매겨 상장처럼 붙여줬다. 가져온 파스는 아무래도 일주일도 가지 않아 동이 날 모양새였다.

 일기장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는데 입에서 에구구구 소리가 흘러나왔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파스를 붙인 자리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 생생한 감각과 소리들. 여기까지 온 게 꿈이 아니구나.

 뜨거운 물을 부운 찻잔에 티백을 하나 넣고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창문 밖으로 별을 본 순간부터 한 글자씩 되돌아 걸으니, 하루 종일 맑고 쾌청했던 날씨가 새삼 고마웠다.

 유리문 너머 마당에는 짙은 어둠이 소복소복 쌓여갔다.







day 1. Le Puy-en-Velay > Montbonnet

거리: 18.4 km
           
숙소 :  Gîte d'étape privé  l'Escole
           주소- 43370 Montbonnet
           호스트- Marie-annick Blanc
           가격 - 도미토리 14€, 아침식사 5.50€, 저녁식사 13.50€, DP(아침과 저녁식사, 숙박) 32€, 캠핑 6€, 빨래 8€, 시트 대여 3€,주방 사용 가능
          규모- 15명 수용
          운영시기 - 3월부터 10월까지
          오픈 시간 - 오후 3시                  
          (2018년 3월 기준)


*르퓌를 떠나는 언덕만 오르면 길의 경사는 내내 완만합니다. 비포장길이 대부분이라 미끄러운 진흙길과 걸려 넘어지기 쉬운 바닥의 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르퓌길은 11월부터 3월까지 비수기입니다. 그 시기에 문을 닫는 숙소가 많고, 미암미암도도에 영업한다고 되어 있는 식당과 카페도 닫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 전에라도 숙소를 미리 예약해두거나 배낭에 물과 비상식량을 늘 조금씩이라도 준비하세요. (저는 예약 없이 그냥 다니긴 했습니다.)

* 르퓌 대성당의 순례자 미사 (2018년 3월 기준)
   11월-3월 :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 7시 반
   4월-10월 : 매일 아침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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