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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Oct 29. 2020

영화 <변산> 리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힐수록 삶은 풍요롭다

영화 <변산> 포스터.


가끔 언제 개봉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VOD 서비스에 떠있는 주옥같은 영화들을 발견한다. <변산>도 그런 영화였다. 클립을 보니 B급 감성이 진하게 묻어났는데(평소라면 잘 안 볼 스타일의 영화라는 소리), 주연이 배우 박정민이었다.(그래서 보고 싶어 졌다는 소리). 평소 배우 박정민의 연기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변산 (2017)
제작 : 한국,드라마 │ 감독 : 이준익
출연 : 박정민(학수), 김고은(선미), 장항선(학수父)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23분


변산 출신의 서울 거주자, 래퍼 학수.


박정민이 연기한 주인공 '학수'는 래퍼 지망생이다. 그는 변산이라는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영화상 지어낸 지명인 줄 알았더니 실제로 존재하는 그곳은, 전북 부안군에 위치하는 면 단위의 작은 동네였다. 그런데 학수는 변산이 퍽 싫었던 것 같다. 화려한 래퍼를 꿈꾸며 서울로 상경했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는 서울 태생이라고 소위 뻥을 치는 중이니 말이다. <쇼미더머니>에 6년째 도전해가며 인생의 변곡점을 애타게 찾던 그에게, 어느 날 한 가지 반갑지 않은 소식이 찾아든다. 바로 변산에 계신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것.


학수에게 아버지란 증오의 대상이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주먹 쓰는 일을 하며 가족을 돌보는데 소홀했다. 덕분에 늘 괴롭고 애처롭기만 했던 어머니와의 기억들. 어쩌면 학수가 변산을 뜨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아픈 가정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혈연이 무섭다고 막상 아버지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학수는 맘이 편치 않았는지, 결국 아버지를 찾아 지긋지긋한 고향 변산으로 향한다. 아버지와 더불어 잊고 싶었던 구린 것들로 가득한 그곳으로.


변산의 촌스런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


도착하니 아아. 변산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재미없고 촌스런 사람들. 안면몰수한 아버지와 그의 꼬붕. 학창 시절 자신을 짝사랑했던 조금 이상한 여자아이 '선미'까지. 뭐 하나 주는 것도 없이 밉기만 한 그것들 속에서, 학수는 구리구리한 출신성분을 재확인받는 것 같아 괴롭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당분간 아버지의 병간호 아닌 병간호를 하게 되면서 이곳에서 지내기로 하는데.


그러다 우연히 동창 '미경'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학창 시절 학수가 짝사랑했던 상대이자, 변산에서 유일하게 세련되고 무지하게 이쁘다. 그때는 까였지만, 학수는 다시금 미경을 보니 옛날의 감정이 몽글몽글 샘솟는다. 하지만 이쁜 미경의 어장에는 학수뿐 아니라 몇 명의 남자가 더 포획되어 허우적대고 있었다. 심지어 다 좁디좁은 변산 바닥에서 아는 얼굴들이다. 그 사이에서 은근히 학수는 자신이 제일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미경에게도 학수가 제일 괜찮은지는 알 수 없는 노릇.



학수의 눈에는 이상한 선미.


하지만 미경과 어떻게 해보고 싶은 학수에게 뜻하지 않은 인물이 들러붙는다. 아버지와 같은 병실을 쓰는 한 남성의 딸 선미다. 마찬가지로 학수와 동창이고, 과거 자신을 짝사랑한 전력이 있으며, 학수의 눈에는 어딘가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녀. 하루 종일 아버지의 간병인 노릇을 하는 선미는, 노트북도 없이 종이에 연필로 사각거리며 글을 쓰는 작가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학수의 눈엔 미경에 댈 것도 아닌 여자, 선미. 그녀는 촌스럽기 그지없어서 자꾸만 잊고 싶은 변산의 기억들을 소환시킨다.


하지만 선미는 징글징글하게 학수의 삶에 간섭하려 든다. 자꾸 학수에게 변했다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지적질을 한다. 선미는 귀찮게 하고, 미경은 다른 남자들과 자신을 재가며 헷갈리게 하고, 아버지는 죽는다면서 안 죽고, 그렇게 학수의 지긋지긋한 변산 라이프는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는데... 시간이 진짜 약이라서 그런 걸까, 덕분에 학수의 눈에 그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학수가 사랑했던 변산의 노을.


그 시작은 노을이다. 모든 기억이 다 촌스러워 잊고 싶은 줄만 알았던 고향 변산에, 생각해보니 학수가 사랑하는 것도 있었다. 학수의 표현대로라면 '너무도 가난해 가진 게 노을밖에 없었던 변산'의 그 노을이다. 노랗게 바닷가를 물들이는 끝내주는 노을은, 서울에는 없는 것이다. 학수가 사랑했던 그 노을을 다시금 각인시켜준 건 다름 아닌 선미다. 끈덕지게 학수의 곁에 맴도는 그녀는, 들어보니 학수 덕분에 노을을 사랑하게 됐단다. 그래서 그녀가 썼다는 책 이름도 '노을 마니아'라고. 


세련되고 화려한 삶을 지향했지만 가슴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던 학수에게 선미의 말들이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지. 학수는 변산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노을만은 아니었음을 차츰차츰, 깨닫는다. 노란 노을만은 풍요롭게 물드는 폐항. 촌스럽긴 해도 구수한 인품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보여주는, 마찬가지로 서울에는 없을 다정하고 끈끈한 무언가 들이 변산에는 있었던 것. 그걸 깨달아가는 학수를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고향을 잊고 싶은 마음을 나도 잘 안다. 그곳이 촌스런 '지방'일수록 더더욱 그 마음이 클 지도.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그게 꼭 고향이 촌스러워서는 아니다.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을 외면하고 싶어서 애꿎은 고향을 미워하며 거기다 기억들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서울에 가면 뭔가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고, 촌스런 과거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과거를 청산해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나겠다는 건 한낱 꿈인지도 모른다. 과거는 청산하는 게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고, 이해하고 품어야 하는 것이더라. 학수가 그동안 괴로웠던 건 내내 변산이라는 자신의 출신, 거기에 두고 온 아픈 기억들을 무작정 외면했기 때문이 아닐까. 덮어두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치유하려 애쓰고, 결국엔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유가 되고 나면 더 이상 밉지 않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값나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 동창 선미가 학수에게 했던 말이다. 영화가 끝나갈 때 즈음 아마도 학수는 그 말의 뜻을 알았을 것이다. 새초롬하게 구는 미경보다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하고 응원하는 선미를 좋아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죽도록 미웠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으니까.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나 변산을 완전히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 학수는 분명 전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깨달음을 얻은 학수의 랩은 더 깊이있다.


개인적으로 <쇼미더머니> 참가자들이 가장 멋져 보이는 순간은, 허세에 쪄들어 내가 제일 멋진 놈이라고 외칠 때가 아니라, 자신의 시련이나 성장통을 음악에 녹여낼 때다. 그 가사에 진정성과 철학이 묻어나는 순간, 그 사람의 랩 실력뿐 아니라 그가 추구할 음악의 방향 같은 것도 함께 보이기에. 물론 학수가 <쇼미더머니>에 붙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한층 성장했을 것이다. 값나지는 못해도 후지지 않은 삶을 살아갈 학수를 응원하고 싶다.


그런 학수를 보며, 내 고향 대전에 내가 애써 외면하고 묻어둔 것들은 뭐였는지 생각해본다. 나도 학수처럼, 하나씩 이해하고 용서해봐야지.




해당 포스트는 인스타그램 매거진 <주간우두미>의 28호 포스트의 일부입니다. <주간우두미>는 인스타그램 @woodumi 계정 또는 해시태그 #주간우두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020 매우 주관적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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