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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 살, 열번 째 읽다.
<달콤한 나의 도시>

달콤(쌉싸르)한 주인공 오은수와 동갑이 된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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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한 살. 서른한 살의 시간이 고작 한 달 남짓 남았다. 누군가 그랬던 게 기억난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될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서른에서 서른 하나 될 때 나름의 타격이 있었더라고. 가만 생각해보면 난 서른에서 서른 하나 될 때에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묘하게, 서른 하나가 저물고 곧 서른둘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좀 가슴이 먹먹하다. 아마도 '그래도 20대 같고 상큼한' 30대의 마지노선이 내 마음속에선 서른하나였나 보다.


바야흐로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 티비에선 모두들 연말연시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으라 그런다. 어차피 화려하고 벅쩍지근하게 놀 재주도 없거니와 북적이는 인파도 싫어해서, 새해 일출을 본다거나 해피뉴이어를 외치러 강남 한복판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한 달도 안 남은 이 서른한 살의 싱숭생숭한 기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뭔가 조용하고도 의미 있을 나만의 연말 선물을 떠올리다가, 책장의 소설책 <달콤한 나의 도시>를 꺼내 들었다.


달콤한 나의 도시 (2006)
장르 : 한국, 장편소설
저자 : 정이현 │ 출판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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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 소설은 나의 오랜 정신적 안식처였던 책으로, 좀 오바일지 모르나 내 인생의 바이블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담백하고도 매력적인 작가의 문체는 나를 글쓰기에 입문시켰으며, 주인공 '오은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는 그저 달콤하지만은 않은 이유로 나를 사로잡았다. 책 속의 영원히 늙지 않은 그녀 오은수는 서른한 살. 나의 서른한 살이 지기 전에, 그녀와 동갑이 된 기념으로 꼭 이 책을 한 번 더 읽고 2020년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거의 매년 읽었던 것 같다. 그렇담 나는 왜 이 책을 이다지도 좋아하는가. 그건 아마도 낭만을 지향하면서도 염세적인 나의 성격이 은수의 성격과 맞물려서가 아닐까 싶다. 둥글둥글하고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불만 많고 뭔가가 매번 당혹스러워 '이게 인생이 맞나?' 하는 주인공 은수의 모습이 꼭 나 같다. 그녀를 중심으로 펼쳐진 인물들은 모두 제각기 당돌한 성격들을 뽐내며 살아가지만, 은수는 그들을 동경하면서도 시샘하며 늘 관찰자 같은 삶을 산다는 점에서도.


남자 문제는 또 어떤가. 머리로는 끌리지만 가슴은 동요하지 않는 번듯한 남자 김영수와, 머리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끌리는 일곱 살 어린 연하남 태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를 늘 가늠하고 계산하지만 늘 답을 모른다. 그런 자신을 한탄하는 모습이 또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연애사도 딱 그 모양 그 꼴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서른한 살. 뭐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눈가 주름이 확 늘어나거나 갑자기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건 사실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예전보다 훨씬 잘 참아내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나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 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 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하고 확고하게 단정해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중




우유부단, 회의감, 불안, 삶을 관통하는 만성적 우울 등... 이 책에 그려진 서른한 살의 생각이, 하나도 멋지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 책을 읽어온 지 어언 10년이 넘어간다. 그런데 그' 안' 멋진 주인공의 이야기를 왜 그리 매번 그렇게나 사랑하고 사랑했는지, 내가 서른한 살이 되어보니 더욱 절감하겠다. 나도 그녀의 나이가 되어보니 꼭 그녀 같을 수밖에 없더라는 거. 슈퍼우먼 따위가 되기는커녕,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갈등하고, 결과에 탄식하고, 스스로가 지긋지긋해지는 일들이 여전히 서른 하나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아니 더 심해지고 있음을 나날이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우울해도 긍정이나 희망 따위를 놓아버린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에서 또 이 책이 좋다. 그녀는 궁시렁 거리면서, 이게 맞는지 매번 의심을 하면서도, 앞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본능도 따라보고, 머리도 따라보고, 친구랑 싸웠다 화해하고, 엄마를 미워했다 사랑하고. 그게 인생이란 걸, 슈퍼우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깨달으면서. 그녀의 그런 지난한 과정들이, 반짝이는 삶이 아님에도 나를 매번 위로하는 듯했다.


그녀와 동갑이 되어 다시 이 책을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 내 마음에 박힌다. 사회적으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에 대해 은수는 말한다. 그 염세적인 톤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씁쓸한 현실을 살아내는 법에 대해서도. 밑줄을 얼마나 쳤는지 책이 형광펜의 도가니다.


그녀 말대로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그리 낭만적이지 만은 않았다. 주변인들과의 관계, 생계, 가족,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 그 모두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 지독히 현실적이고 어쩔 땐 쓰리기까지 한 것들을 끌어안고 삶을 지탱하는 것이 인생이란 걸 배운다.


어찌 됐든 또 연말이 됐고, 또 새해가 될 것이고,

나는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행복한,

은수 같은 여자로 '잘' 살아내고 싶다.




해당 포스트는 인스타그램 매거진 <주간우두미>의 35호 포스트의 일부입니다. <주간우두미>는 인스타그램 @woodumi 계정 또는 해시태그 #주간우두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020 주관적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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