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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높은 언니의 삶,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언니는 정말 복도 많지 복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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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제작 : 한국,드라마 │ 감독 : 김초희
출연 : 강말금(찬실), 윤여정(할머니), 윤승아(소피) 외
등급 : 전체 관람가 │ 러닝타임 : 9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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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까놓고 말하겠다. '찬실'은, 나이 마흔에 미혼이고 벌어놓은 돈도 없고 직업적으로 그다지 성공도 하지 못한 여자다. 영화가 좋아 영화판에 붙어 PD 일을 해왔지만, 상업영화보단 예술 쪽에 뜻을 느껴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최근엔 따르던 감독이 술을 마시다 급사를 하는 바람에, 다시 영화판에서 일하기도 힘들어진 상태.


그녀는 짐을 싸들고 다세대 주택으로 황망히 이사를 왔다. 그곳엔 "그니까 그게(영화 PD) 뭐 하는 건데?"라고 묻는 일자무식 집주인 할머니와,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며 본인이 장국영이라고 우기는 미친 남자가 세 들어 산다. 그뿐이 아니다. 굶어 죽을 순 없기에, 친하게 지내던 여배우 동생 '소피'의 집에서 얼떨결에 가사도우미를 자청해 일하게 되는데, 그마저도 집에 드나드는 스태프들 눈을 피해 다니느라 녹록지 않다. 씁쓸하지만 그것이 40세 찬실의 현주소다.


솔직히 이쯤에서 나라면, 이미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마흔이 되도록 영화 하나만 바라봤는데, 영화가 내게 준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실패요, 최근 10년간 연애한 기억도 없어요, 아... 그것만으로도 벌써 울적할 노릇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찬실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도 그게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common (10).jpg 자존감 높은 찬실언니


소위 성공과는 거리가 먼 찬실의 삶. 그런 회색빛 현실에도 찬실이 괜찮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면면이 그녀를 살펴보니, 아, 그 이유를 알겠다. 그녀는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다. '으, 나라면 우울해서 죽을 거 같은데'라는 내 생각을 쿨하게 까내리듯, 그녀는 일자무식 집주인 할머니의 글공부를 도와주고, 소피의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자신의 신세와는 상관없이 소피의 불어 선생님을 짝사랑하기도 한다.


찬실의 그런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높은 자존감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남들이 바라보는 사회통념적 내 신세가 어떻건 간에 내가 나를 괜찮게 여기는 그 마음! 그 단단한 마음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다져져 온 것이기에, 찬실은 실패에도 바스라지지 않고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초반부에는 '어머 저 언니 어떡해... 불쌍해' 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걱정이 되기는커녕 되려 부러웠다. 그녀라면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라도, 아니 어떤 상황이 되든,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 것 같았다.


저렇게 지지리 복 없는 여자를 두고 왜 영화 제목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일까 싶었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자신의 주어진 상황을 비극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건강히 꾸려나갈 줄 아는 마음이 복(福)이 아니면 무엇이랴. 나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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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의 곁에 머무는 좋은 사람들


그런 찬실의 곁에는 그래서일까 사람이 따르는 것 같다. 꼬장꼬장한 집주인 할머니도 결국엔 찬실에게 마음을 열고, 소피도 찬실에게 의지하고, 영화판에서 더 이상 아무 힘도 없지만 몇몇 스태프들도 그녀를 따르지 않는가. 영화 말미에 가서는 나도 그녀를 언니로 따르고 싶어 졌다. 그녀처럼 생각하고 싶고, 그녀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어지더라. 그 불어 선생님에게는 사랑고백을 했다 까였지만, 그때도 그녀는 코 한 번 훌쩍이고는 털고 일어난다. 아, 정말 대단한 찬실 언니! 아무래도 그녀는 그 상황에도 자신을 '마흔 줄에 연하남에게나 까이는 신세'라고는 죽어도 생각 안 했을 거다. 그런 그녀기에, 그 불어 선생님조차도 결국엔 남자로는 아니지만 친구로서 곁에 남았던 게 아닐까. 사람의 건강한 마인드는 세상 돈 주고 사지 못할 자산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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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이지만 소탈하고 건강한 주제의식을 가진 이 영화, 정말 예기치 못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난로 하나를 아랫배에 댄 것처럼 뜨-끈 하다. 언니.. 찬실 언니. 건강해서 너무너무 닮고 싶은 사랑스러운 찬실 언니.


소피가 먹다 버린 소주병을 정리하고 있어도,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불어 선생님한테 고백했다가 까여도, 하나도 불행해 보이지 않는 찬실 언니를 너무 닮고 싶어졌다. 그녀는 불우한 자신의 상황을, 전혀 불우하지 않게 여김으로써 우리에게 말해준다. 어떤 상황이 오든 나 스스로를 괜찮다 여기면 정말 괜찮아진다고. 복이 많다 여기면 정말 복이 많아진다고. 찬실 언니처럼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해당 포스트는 인스타그램 매거진 <주간우두미>의 37호 포스트의 일부입니다. <주간우두미>는 인스타그램 @woodumi 계정 또는 해시태그 #주간우두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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