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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Dec 05. 2020

이토록 사랑스러운 우울 극복기, 영화 <줄리&줄리아>

줄리의 우울 극복 프로젝트 : 프랑스 요리 524가지 마스터하기!


나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자주 본다. 그날도, 쉬는 시간에 휴게실에 누워 이리저리 영화를 고르고 있었다. 직장생활이 우울함에 찌들어있던 터라, 밝고 명랑한 영화를 보고 싶었다. 메릴 스트립과 이름 모를 여배우가 활짝 웃고 있는 포스터의 영화 <줄리&줄리아>를 발견하고 손이 멈췄다. 밝음이 가득하다면 뭐라도 좋아. 곧장 영화를 눌러 순식간에 보게 됐다. 영화의 도입부에 "두 실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라는 설명이 나왔다. '밝은데 실화야? 어우, 더 좋아' 단순히 기분전환으로 선택한 영화는, 밝음으로 시작해 설명하기 힘든 경외심으로 끝났다. 그리고 내 마음에 깊이 자리 잡다 못해 어떤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줄리&줄리아 (Julie&Julia, 2009)
제작 : 미국,드라마 │ 감독 : 노라 애프론
출연 : 메릴 스트립(줄리아 차일드), 에이미 애덤스 (줄리 파웰)
등급 : 12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22분



영화가 그려낸 두 가지 실화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두 여성의 삶이다. 하나는, 1960년대에 프랑스 가정식을 미국에 전파한 여성 '줄리아 차일드'의 삶, 다른 하나는 그 여성을 동경해 그녀의 레시피를 2008년, 1년간 도전해 온 '줄리 파웰'이라는 여성의 삶. 각각 줄리아와 줄리, 이름도 비슷한 두 여성은 실화이지만 무지 영화 같은 스토리로 이어져있었다.



위축되고 우울해하던 줄리의 삶.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특히나 나는 '줄리 파웰'의 입장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는데,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말단직으로 일하며 위축된 삶을 살던 줄리(파웰)가 마치 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처럼 불만족스러운 일상을 지내는 중이었으니까. 뭔가가 막막했지만, 테트리스처럼 밀려오는 현실을 걷어치울 용기는 없었다. 그녀와 닮은 점은 또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아직 내세울만한 이력은 없다는 거(줄리를 닮았다), 이 만성적 우울감을 타개할만한 어떤 동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거(이것도 줄리를 닮았다), 그리고 (줄리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도 요리를 좋아한다는 거.


줄리(파웰)는 자신의 우울감 그리고 자신이 뭔갈 진득하게 해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떨치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줄리아(차일드)의 요리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줄리아(차일드)의 요리책에 소개된 524가지의 프랑스 가정식을 1년간 마스터하는 것을 목표로 세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목표였다. '프랑스 가정식 마스터'하기라니, 남들이 보면 사회적으로 아무 메리트 없는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걸 마스터한들 이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취업이 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리사로 고용될만한 소위 '증'이 나오는 공부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는 왜 이 요리책 마스터에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던 걸까.



줄리아의 요리책 <프랑스 요리의 달인이 되는 법>을 따라하기 시작한 줄리.
줄리가 따라하기 시작한 대상, 줄리아 차일드.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작더라도 실현이 가능한 성취였을 것이다. 어쩌면 지쳐있을수록 그렇다. 작은 스텝부터 시작하면 작은 성취가 쌓여 큰 성취가 되고, 서서히 자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처음부터 '마라톤 49km 종주하기'를 목표로 삼으면 절대 스스로를 응원하지 못할 일도, '뒷산 끝까지 올라보기'를 목표로 설정하면 해 볼 의지가 생기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니던가. 그러니, 작고 사소하지만 내 무너진 일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 나 스스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 그래서 다시 내 생활에 활력을 찾아줄 만한 요소가 다분한 일들이야말로, 번아웃(Burnout syndrome)*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목표가 아닐까.


잘난 친구들에게 명함은 내밀 수 있겠지만, 시험장에 가서 시간에 쫓기며 조리사 자격증을 따야 하는 일이었다면 아마 줄리(파웰)는 더 깊은 우울의 수렁으로 빠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에 내세울 수 없을 일일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책 한 권을 하나하나 익혀감으로써 삶을 작은 성취로 채워나갔다. "난 아무것도 끝까지 못해"하던 그녀는, 영화 말미에 524가지의 레시피를 모두 마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긴 호흡으로 작은 성취를 쌓아나간 그녀의 일화는, 휴게실에 누워 시름시름 앓던 2020년의 나를 고무시키기에 이르렀다. 여느 때처럼 지옥 같은 일상을 견디던 그 날, 충동적이지만 나도 줄리(파웰)처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번아웃 증후군 (Brunout syndrome)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이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연소 증후군', 혹은 '탈진 증후군'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요리를 하며 줄리의 삶은 만족으로 채워진다.


나는 올해 초부터 오랜 번아웃 증상에 시달리며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스스로에 대한 만족과 성취를 느끼고는 싶으나, 나를 옥죄는 무리한 목표 설정은 또 싫었던 내게, 줄리아의 성취 스토리가 너무나 감격스럽게 와 닿았음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녀처럼 남들이 몰라줘도 나만은 뿌듯한 성취를 느끼기에 다분한 뭔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그녀를 따라 프랑스 가정식 524가지를 해보려고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 해외원서(한국어 번역본이 없는지라)를 구입했다가 번역의 어려움에 그만 책을 덮어야 했다. 뭐 어때, 요리가 아니어도 좋다. 전국의 맛있다는 빵집 원정 다니며 기록하기가 될 수도 있고, 문학상에서 수상한 책들 모조리 독파하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게 뭐든, 내 삶을 다시 활력으로 채울 요소들을 그녀처럼 찾아보는 게 중요한 거니까.



안타깝게도 이 영화를 본지 한 달째, 아직 그럴싸한 나만의 아이템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정말 다행히 내 삶은 지금 활력으로 부스팅 된 상태다. 일단은 데워졌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나도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내 삶을 다시 행복과 성취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한 지금, 우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자극을 준 그녀 줄리에게 너무나 고맙다. 줄리를 일으켜주었던 1960년대의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에게도. 어서 이 희망의 불씨가 사라지기 전에, 나만의 행복 투두 리스트를 만들어봐야겠다.



실제 줄리 파웰(좌)와 줄리아 차일드(우).



해당 포스트는 인스타그램 매거진 <주간우두미>의 34호 포스트의 일부입니다. <주간우두미>는 인스타그램 @woodumi 계정 또는 해시태그 #주간우두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020 주관적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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