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당하나 했는데, 우리 엄마가 당하다니 이럴수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기질에 휘둘려 엄한 계좌로 돈을 입금하고, 자기 주민번호나 카드번호 같은 것을 알려주는 사람. "아니 저따위 질 낮은 수법에 당한다고?" 대체 그런 바보들은 대체 누구일까 생각했었다. 태생이 의심 덩어리인 나로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나를 낳아준 사람이니 나는 내 엄마도 한 의심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엄마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평소 핸드폰을 잘 쳐다보지 않는 내게, 엄마의 다급한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찍혀있는 걸 발견한 건 저녁 여섯 시였다. 남편이 퇴근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가장 먼저 한 첫마디가 "자기 왜 장모님 전화 안 받아!"였기 때문에. 엄마든 친구든 전화 잘 안 받는 건 내 오랜 고질병인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퇴근한 남편의 첫마디가 그러니 수상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남편의 충격적인 말. "장모님 보이스피싱 당하셨어!"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저번 주, 나흘간 세종에 있는 친정집에 다녀왔었다. 그때 엄마는 내 핸드폰을 보고 "아니 폰이 또 왜 이리 깨졌어"라며 혀를 끌끌 찼었다. 주의력이 부족한 내가 전면 후면이 다 유리로 된 내 아이폰을 깨 먹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엄마 눈에는 매우 안쓰러웠나 보다. 그렇게 엄마의 눈에 각인된 와장창 깨진 내 아이폰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어제, 엄마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마침 사기꾼에게 온 문자의 내용은 이러하다 했다.
「엄마, 나 핸드폰이 깨져서 수리하러 왔어. 지금 문자밖에 못해.」
이 문자를 시작으로, 사기꾼은 엄마에게 무려 서너 통이나 문자를 더 했다고 한다. 무슨 인증번호를 말해달라느니, 뭘 설치하라느니, 나였으면 "이 잡범이 어디서 개수작이야"라고 했을 법한 몹시 냄새나는 수법에, 엄마는 순순히 놀아나고 말았다. 저번 주에 내 핸드폰이 깨진 걸 두 눈으로 봤기 때문에 의심을 안 했다고 한다. 맙소사, 아다리가 맞으려면 이렇게 또 맞는구나.
그렇게 사기꾼이 시키는 대로 인증번호니 뭐니 다 알려준 엄마는, 잠시 뒤 두 장의 신용카드로 각각 55만 원과 27만 원이 승인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이 승인 건이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카드사 측에서 보이스피싱 같다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해주었다는 것. (아마도 카드사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눈뜨고 코 베일 뻔했다) 그러고 나서 놀란 마음에 딸내미에게 전화를 두 통이나 했으나 딸내미는 평소처럼 전화를 잘 받지 않았고, 연이어 사위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된 나는, 전화를 걸어 안 그래도 놀랐을 엄마에게 대체 그런 것에 왜 넘어가느냐고 질책을 했다. 내가 그런 상황이면 남편에게 먼저 연락하지 왜 엄마한테 그랬겠느냐고, 그리고 정말 수리하러 가서 전화가 안 되는 거면 매장 직원 전화라도 빌려서 했겠지 왜 문자로 그러겠느냐고. 내 생각엔 다 이해되지 않는 엄마의 행동들이, 결국은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란 걸 인지하는 데는 조금 더 걸렸다.
"아니 네가 폰이 깨졌었으니까... 당연히 넌 줄 알았지"
뒤늦게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를 떠올리니 마음 한쪽이 먹먹했다. 수리비가 아깝다고 깨진 핸드폰 위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있던 딸. 그 딸이 핸드폰을 고치러 갔는데 뭐가 잘 풀리지 않아 엄마에게 S.O.S를 요청했다고 생각했을 엄마. 그래서 인증번호고 뭐고 당장 알려줘서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우리 엄마... 이렇게 자식의 문제라면 평소답지 않게 의심의 고삐를 풀고 버선발로 뛰쳐나가는 엄마들의 마음을, 보이스피싱 사기꾼들은 범죄에 이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울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 대체 어떤 개자식이야, 내가 잡아 족쳐 버리겠어!
그러나 사기꾼이 나를 사칭해 보낸 문자는 나중에 확인해보니 온데간데없이 지워져있었다고 했다. 사기수법은 그렇게 허접하면서도 잡히지 못하게 꼬리를 내빼는 데는 치밀한 놈들이었다. 당장 사이버수사대로 찾아가 어떤 버르장머리 없는 개자식인지 알아내 싸대기라도 후하게 갈기려던 내 각오는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쒹쒹 거리며 욕하는 것 말고는 상처 받은 엄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엄마는 현재 카드사 측의 도움으로 카드승인 취소 접수를 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카드사 중 한 곳에서는 취소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알려왔다고 했다. 55만 원과 27만 원 중, 못 돌려받는 게 그래도 27만 원짜리였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그게 엄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내 최선이라니... 마음이 욱신거린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얘기를 전했고, 분명히 또 자식일이라면 고삐를 풀고 통장 비밀번호라도 술술 알려줄 부모님들을 주의시켜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 엄만 당했지만, 사랑하는 친구들의 부모님들이라도 피해를 입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빠에게도 전화를 해 이 사실을 알렸더니 아빠는 걱정을 하면서도 "허허, 네 엄마 완전 허당이라니까"라는 일침을 날렸다. 하지만 아빠... 엄마가 허당이어서가 아냐. 내 문제여서 그래,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날로 보이스피싱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경찰과 검찰을 사칭하다 못해, 이제 모성애를 후벼 파 돈을 뜯으려는 나쁜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그런 놈들의 수법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이 글을 보는 누군가의 아들딸들은 시간 날 때마다 부모님들을 각별히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엄마, 나는 위험에 쳐해도 엄마에게 카드번호나 통장 비밀번호를 요구할 일은 절대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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