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이 부른 비극
지금껏 내가 보아왔던 브라운관 속 배우 김하늘의 모습은 대부분 예쁘고 청순한 여주인공이었다. 열등감을 가지기 보자는 다른 여자들로 하여금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쪽에 가까운 캐릭터들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열등감에 사무친 연기는, 한때 예쁨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배우 이미지를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색다르고 멋졌다. 그리고 영화 또한 좋았다.
김하늘은 한 남고에서 계약직 교사로 일하는 효주역을 맡았다. 교사 체계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효주는 정교사(정규직)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 교직생활을 이어 나간다.
형편이라도 넉넉하면 좋으련만, 아마도 전세일 법한 투룸에서 10년째 사귄 남자 친구를 거의 벌어 먹이며 살아간다. 기약도 없는 정규직 TO만을 바라보며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면, 집은 반백수 남친이 먹은 편의점 음식들이 나뒹구는 돼지우리가 되어있다. 그 남친은 늘 "왔어?"만을 반복하며 집안일엔 손 하나 까딱 안 한다. 난 대체 저 한심한 인간을 왜 받아주고 사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됐지만, 효주는 힘든 일상에 애 같은 남친까지 거두어야 하는 팔자인가 보다.
이미 충분히 고단한 효주의 삶인데, 그 쯤 효주를 더 힘들게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학교 이사장의 따님이라는 분이 하필이면 같은 과목 화학교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따님이 알고 보니 자신의 대학 후배 혜영(유인영)이란다. 같은자리를 두고 가진 조건 자체가 너무도 차이나는 두 사람이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사람의 심리란 게 원래 그런 것 같다. 범접할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은 나와 너무 동떨어져서 비교대상으로 삼지 않는데 반해, 자신과 같은 무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너무 격차 나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질투가 난다. 효주에겐 혜영이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자신과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혜영은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고 심지어 아버지는 이사장이다. 속칭 부모의 빽으로 학교에 와서는, 힘들게 살아가는 자신 앞에서 뻐기기라도 하듯 해맑게 아는 척을 하는 혜영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런 혜영은 컨셉인지 뭔지 효주에게 친한 척을 하는데, 하루는 자신의 잘생긴 부자 남친을 소개하며 효주의 열등감을 북돋는다.(앞서 말했다시피 효주의 남친은 경제력을 떠나 배려심도 없다)그리고 그 부자 남친을 보고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진 그 날, 일하는 효주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한 반백수 남친은 짐을 싸고 나가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효주는, 임시 담임을 맡은 반의 무용 특기생 재하가 체육관에서 혼자 연습한다는 것을 알고 퇴근 후 불 켜진 체육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서 혜영과 남학생 재하가 성관계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처음에 효주는 단순히 완벽하기만 한 혜영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혜영에게 자신이 알게 된 약점을 알린 뒤 제자 재하와 헤어지게 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재하에게 무용학원을 등록해주고 콩쿠르에 지원을 시키는 등 혜영과는 다른, 자신의 교사로서의 올바른 태도를 뽐내려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재하와 함께하게 되면서 혜영이 가진 남학생을 여자로서 뺏고 싶다는 생각으로 진화한다.
재하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봤을법한 인기 많고 잘 놀던 전형적인 상급생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어찌나 여심을 잘 알고 색기가 넘치는지, 그 눈웃음과 어린아이답지 않은 남성미는 연상의 여인들을 홀리기 충분해 보였다.
매일 집을 태워다 주던 효주에게 어느 순간부터 배시시 웃으면서 끼 아닌 끼를 부리더니, 결국 효주가 자신을 집으로 들이게 만든다. 이때도 효주는 재하와 남녀로서 무언갈 하려 한 건 아니었지만(심지어 효주는 할 말만 하고 방문 닫고 취침한다) 결국 자신을 유혹하는 재하를 뿌리치지 못하고 관계를 맺게 된다. 이때부터 비극의 서막이 열리고, 둘은 애인 사이가 된다. 효주는… 재하를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
효주의 사랑과 지원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재하가 콩쿠르에 나가는 날. 어김없이 시험장에 따라가 재하를 지켜보던 효주는 그곳에서 재하를 보러 온 혜영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효주와 함께 내 심장도 곤두박질쳤다. 아니나 다를까 대회가 끝나자 재하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효주는 불안감에 휩싸여 찾아 헤맨다. 보는 내내 나 역시 불안했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은 역시나였다.
알고 보니 혜영과 재하는 정리되기는커녕, 자신의 덜미가 잡혔다고 생각한 혜영이 연막작전으로 재하를 시켜, 효주 또한 재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만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리석은 소년은 혜영이 시키는 대로 효주 앞에서 사랑인 척 거짓 연기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불안감에 휩싸인 효주에게 재하는 이별을 고한다. 효주를 사랑한 적 없다며…
이 영화에서 효주는 단 한차례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혜영에게서 뺏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재하마저도 사실은 혜영을 사랑하고 있었다니. 왜 하늘은 번번이 혜영에게만 특권을 주는 걸까. 배경도 외모도 나이도 남자 친구도 그리고 어린 제자까지도. 단 한 번쯤은 효주에게 온정을 베풀 수도 있을 텐데.
이후 효주는 혜영에게 재하와의 정리되지 않은 관계를 질책하지만, 마찬가지로 효주의 덜미를 잡은 혜영은 전과 다르게 당당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사장인 아버지를 통해 정교사 기회를 두고 효주만 제명되게끔 한다.
가진 전부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교사 자리를 위협받자 효주는, 이윽고 혜영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데… 이 대목은 너무나 마음 아팠다. 다 가진 혜영 앞에서 결국 넘어서기를 포기하고 자존심을 굽혀버릴 수밖에 없는 효주의 한계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학생들이 모두 쳐다보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옷도 외모도 신세도 다 남루한 효주의 무릎은 정녕 이렇게 꿇릴 수밖에 없었던 걸까…
천진난만한 혜영은 그동안 까칠하던 효주가 미안하다며 저자세로 나오자 친언니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매우 요상한 생각으로 기뻐한다. 효주가 미안하다고 무릎 꿇은 것을 두고 자신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된 거라고 착각하다니. 영악하기라도 하면 덜 미울 텐데 혜영은 멍청하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효주는 혜영의 친한 언니 코스프레를 하며, 말이 친한 언니지 하녀 노릇을 하게 된다. 제 손으로 뭘 해봤을 리 만무한 혜영은 자신의 집에 효주를 불러 하녀처럼 부린다. 호화로운 집 벽에는 누가 봐도 완벽해 보이는 부자 남친과의 결혼사진이 걸려있고, 부엌에선 그런 삶을 살아본 적 없는 효주가 체념한 듯 혜영을 먹일 음식거리를 준비한다.
그런데 공주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혜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지금껏 모든 걸 참고 혜영의 식모까지 감행하려던 효주의 마지막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언니, 근데 재하가 그러더라? 언니가 자기를 진짜로 사랑하는 것 같다고. 너무 웃기지? 언니 걔 사랑한 거 아니지? 나 죄책감 안 느껴도 되지? …… 그 핏덩일 어떻게 사랑해, 잘 때나 좋지. 그냥 우쭈쭈 하며 만나주는 거지"
이 대목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효주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자신의 모멸감을 앙갚음하듯, 그대로 팔팔 끓는 주전자의 물을 잠든 혜영의 얼굴에 무자비하게 부어버린다. 혜영은 의식을 잃고, 효주는 재하에게 연락한다.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 마저도 혜영을 향했던 재하에게, 화상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악녀를 목도하게 한다.
물론 효주가 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범죄가 아니라고 합리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난 그녀의 행위에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 없었던 걸까. 비뚤어진 열등감이 낳은 괴물 같은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었을까.
효주에겐 사랑이라고 느꼈던 감정마저 장난이라고 까르르 웃어넘기던 혜영은 벌 받지 않고 당당히 모든 것을 가지며 살아가는 게 과연 이 사회의 당연하고 냉정한 순리인 걸까?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교사가 되기 위해 청춘을 포기하고 공부에 매진했을 테고, 그렇게 취직한 자리마저도 고용불안을 안겨주는 상황에서, 어느 날 눈앞에 금수저로 자란 아이가 해맑게 나타나 나의 유일한 것들을 위협하려고 한다면. 난 세상을 저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금수저가 "전 교사 어차피 오래 할 생각 없어요", "전 결혼하면 캐나다로 가려구요"와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내가 가진 전부를 손쉽게 앗아가려고 한다면, 내 심정은 효주와 다를까.
정신력이 중요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열등감이라는 것은 늘 부정적으로 쓰인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선한 마음과 불굴의 의지로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이 맞다고 가르치는 세상. 그런데 불평등한 구조와 출발선을 맞닥뜨리게 하는 이 사회는 아무 책임도 없는 걸까?
나는 또 한 명의 효주이기에, 그녀의 열등감이 많이 와 닿았다. 세상에는 많은 혜영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절박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빼앗는다. 빼앗는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자본과 권력으로 얼룩진 약육강식 사회를 방관한다.
세상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좀 더 자비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효주가 잘못된 방식으로 응징을 하기 이전에, 애초에 공평하고 깨끗한 교사 채용이 있었더라면 이 이야기는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겠지.
사회는, 평범한 개인에게 최소한의 자존감은 보존할 수 있을 정도의 불평등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수많은 효주들이 괴물 같은 열등감으로 자멸하게 만들지 않는 첫 번째 길일 것 같다.
2017 매우주관적인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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