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내내 비가 내린 경주에서
나는 경주를 가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갔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 기억에는 음, 확실히 경주가 없었다. 경험이 없으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한데도 이상하게 경주는 가보고 싶지가 않았다. 왠지 특별한 여행지라기보다는, 역사 러버들의 답사 장소 내지는 학생들의 단골 수학여행지 같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으로 느껴졌기 때문일까.
성인이 되어서야, 그곳에 황리단길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단지 역사가 아니더라도 경주를 찬양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뒤늦게 경주가 궁금해졌다. 역사는 쥐뿔 모르지만 요새 핫하다는 황리단길 때문에 경주를 가보고 싶다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완전 그런 사람인 건가. 쿨하게 인정하겠다. 나는야 국가대표 겉멋 든 여행자다! 집에만 처박혀있으니 핫하고 예쁜 게 너무너무 고팠다.
그렇게 32살 인생 처음으로 경주여행을 떠나게 됐다. 그래도 명색이 경주여행인데 유적지를 빼면 섭할 것 같았다. 황리단길 맛집 투어를 베이스로 하되, 경주의 랜드마크인 불국사, 첨성대, 동궁과 월지, 월정교를 3박 4일 일정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경주와 가까운 포항에도 잠시 들렀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남편과 여행을 하는지라 나름대로 설렘에 부풀어있었는데, 여행 전날 일기예보를 체크해보니 우리가 여행하는 4일 내내 비 소식이 있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여행 일정 4일 내내 말이다. 충격적이었다. 아니야 기상청은 맨날 틀리잖아, 갑자기 막 해가 뜨고 살랑바람이 불거야, 하고 무시했지만... 기상청은 이럴 땐 빈틈없이 정확하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오더니 정말로 여행 내내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여행 첫날은 그나마 제일 비가 안 온 편이라서 첨성대 앞에서 사진도 찍고 대릉원도 돌아다니고 그랬는데, 둘째 날부터는 밖을 돌아다니기 어려울 만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때문에 야경이 압권이라는 ‘동궁과 월지’도 못가보고 저녁 8시부터 숙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노라니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낮에는 뭐 대단한 걸 했느냐. 비가 내려 야외의 유적지를 볼 수가 없으니, 계속 밥집이나 카페에 앉아 먹는 것 밖에는 한 게 없었다. 하지만 가는 족족, 사진 한번 찍기 위한 맛집일 뿐 제일 중요한 ‘맛’은 없는 집들이였다. 오도 가도 못하고 맛없는 맛집에 앉아 날이 개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 이걸 여행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물론, 비가 와도 유적지를 볼 수는 있었다. 힘겹게 우산을 쓰고, 시커먼 하늘 아래 비를 맞고 있는 유적지들을 말 그대로 볼 수야 있으니까. 하지만 저 멀리 분당에서 4시간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비 맞고 있는 릉(무덤)과 동궁과 월지가 어찌 기분 좋게 봐지겠는가. 날이 좋았다면 푸르른 릉들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그 자체로 예쁜 풍경을 만들었을 경주가 온통 회색인 것을. 이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실패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우리 부부가 어디를 갔느냐. 아마 날씨가 맑았다면 가볼 생각도 안 했을 박물관을 다녀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 국립경주박물관. 조선시대까지는 흥미진진해도 삼국시대까지 더 거슬러 올라간 역사는 그다지 궁금하지가 않은 나였는데, 오죽 할 게 없으면 그런 내가 박물관을 갔을까. 이게 다 비 때문이었다.
하지만 왠 걸. 막상 으리으리한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는 의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까마득해서 피부에 잘 와닿지 않던 신라시대의 화려한 문화와 생활이, 눈앞에 실재하는 물건을 통해 피부에 와닿는 재미가 있었다. 경주에 신라 유적이 많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세상에 정말이지, 신라인들이 남긴 유적들이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방대함과 복원력에 전율이 돋았다.
신라가 금을 많이 사용한 나라라는 것도 교과서로 접한 지식으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단지 이론으로 딱딱하게 접한 것을 두 눈으로 가까이서 보고 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동감과 경외심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당시 최고 계층들의 위세품으로 쓰였던 금장식들은 실로 어마무지했다. 금팔찌 금목걸이 수준이 아니다. 신발, 허리띠, 모자 장식, 말을 탈 때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들(안장, 얼굴 가리개)까지도 죄다 번쩍이는 금, 금이었다.
박물관의 어느 귀퉁이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신라인들이 그 많은 금을 어디서 났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거대 금광이 있었다는 금광설,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했다는 수입설 등이 존재하지만, 수많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도 아직까지 뚜렷하게 그 출처를 밝히지는 못했다고 한다. 신라는, 한반도의 *엘도라도였던 것이다.
* 엘도라도(El Dorado) : 스페인어로 ‘금가루를 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16세기 에스파냐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아마존강 가에 있다고 상상한 황금의 나라.
어마어마한 양의 금도 미스터리지만, 금을 세공하는 방식 또한 지금껏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다. 신라인들이 금으로 만든 모든 물건들은 변태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고 촘촘하고 정교한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당시에 현미경이 있었을 리도, 찍어내는 기계 방식이 있었을 리도 없는데. 정말 어떻게 그런 정밀한 기술이 가능했을까 놀라울 따름이었다.
박물관은 다행히 하루를 온전히 그곳에서 보낼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비록 비는 왔지만 덕분에 박물관을 갈 수 있었고, 덕분에 신라인들의 금 사랑과 그 영혼을 느낄 수 있었으니, 아주 망한 여행은 아니겠지. 스스로 위안을 삼아 보았다.
3일 차에는 불국사 석굴암을 다녀왔는데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비로 뭉개진 진흙길을 걷고 걸어 당도한 불국사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그 위대한 석굴암이 별로라서가 아니었다. 커다란 유리에 막혀 자세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지금 기술로도 구현해내지 못할 만큼 섬세하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국보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얼만큼 대단한 지를 유리막에 가로막혀 살펴볼 수 조차 없자, 6천원이나 하는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재는 그게 최선이라고 한다. 석굴암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여러 과학적인 기술로 항상 습도와 온도가 균일하게 유지되게끔 설계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 석굴암의 외부를 콘크리트로 발라버리면서 한번 습도와 온도가 틀어졌다고 한다. 이후 1960년대에 와서 이를 복원하려고 노력했지만, 현 기술로는 습도와 온도를 조절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유리막을 씌워 기계로 인위적인 조절을 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석굴암이 만들어질 당시 그대로만 유지되었어도 우리는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부처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를 뚫고 신발을 흙탕물에 버려가며 석굴암을 찾았건만, 그 웅장함을 가까이서 느낄 수가 없다니, 아쉽다 못해 비통했다. 위대한 우리 선조, 망할 일제!
경주는 마지막 날까지도 전혀 맑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원래 마지막 일정으로 가려던 포항도 포기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도 내내 비가 내렸다. 정말 끝내주게 지독한 날씨였다.
그러고 보니 비 내리는 경주에서 나를 위로했던 것들은 모두 의외의 것들이었다. 비를 피하러 들어갔던 경주박물관에서 느낀 신라시대 문화의 경이로움. 그리고 또 하나는, 생각보다 별로였던 황리단길에서 만난 유일한 맛집 <타베르나>였다. 주간우두미에도 밝혔던 <타베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물든 관광지에서 유일하게 빼어난 맛과 정성으로 나를 사로잡은 곳이었다. 거기서 경험한 멋진 저녁식사가 아니었다면, 날씨는 둘째치고 황리단길조차도 저주했을지 모른다.
*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 낙후된 구도심이 활성화되면서 사람들과 돈이 몰리고, 결과적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
맑은 날 다시 경주를 갈 수 있을까. 그때는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릉과, 깨끗한 야경을 볼 수 있을까. 그게 언제인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이번 여행으로는 아쉬움이 많아 다시 한번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다음에 갈 땐 날씨 요정아, 제발 나를 도와줘.
2021 먹고 여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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