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몰랐죠, 경주에서 프랑스 요리를 먹을 줄은...,
타베르나 (taverna)
경북 경주시 첨성로81번길 18 (황남동)
OPEN 12:00 – CLOSE 21:20
BREAK 15:00 – 17:00│ 화요일 휴무
인간은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경주에 여행을 가서는 화려하고 예뻐 보이는 인스타그램용 맛집들에 또 홀려, 톡톡히 당했더랬다. 너무나 핫하다는 모 빵집은 우리 동네 빵집보다도 맛없었고, 너무 예뻐서 맛도 중요치 않을 것 같은 한 한식당은 대기번호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어 발도 디딜 수 없었다. 모처럼만에 떠난 나의 첫 경주 여행은 비가 내리고, 맛없고, 돈 아깝고, 서글퍼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우리 그냥 아무 데나 지나가다 맘에 드는데 들어가자”
그렇게 경주에서 맛보려고 캡처해둔 맛집들을 몽땅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남편과 황리단길을 걷던 중, 인적이 많지 않은 한 식당이 눈에 들어 들어왔다. 경주의 상징과도 같은 기와 모양의 건물에, 이색적이게도 프랑스 다이닝이 메뉴인 요릿집 <타베르나>였다.
‘타베르나(taverna)’는 그리스 지방의 자그마한 음식점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과연 이 사랑스런 단어에 걸맞는 레스토랑은, 어딜 가도 북적여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는 관광지의 여타 음식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인기가 없어서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라, 분위기를 제대로 즐길 사람들을 위한 희소성 짙은 공간에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가격 면에서도, 경주 여행자라면 모두가 들러 필수적으로 ‘뿌실’만한 집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가 주문한 세트메뉴는 2인 가격으로 7만 4천 원. 결코 만만한 금액대는 아니다. 하지만 비가 와서 우울한 탓에, 그 날의 나는 이런 호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호사는 옳았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세트메뉴 중 ‘시그니쳐 코스’였다. 거금이 아깝지 않았던 이유 첫째는, 샐러드부터 디저트까지 하나하나 셰프님이 직접 가져다주시면서 상세히 설명을 곁들여주신다는 거.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거금이 아깝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는 단연 기품 있는 ‘맛’이었다.
제철 해산물 세비체
맨 처음 당도한 건 ‘세비체’였다. 세비체는 해산물을 회처럼 얇게 잘라 과일즙에 재운 후 차갑게 먹는 음식의 명칭이다. 물론 나도 검색해보고 알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거지 뭐. 우리가 갔던 때의 제철 해산물은 돌문어였던 모양이다. 얇게 슬라이스 된 돌문어는 거품이 이는 유기농 사과식초 소스로 새콤하게 맛을 냈고, 이를 마늘빵에 얹어서 함께 먹는다. 돌문어도, 새콤한 소스도 입맛을 제대로 돋우었다.
브라운 크림 페투치네
그다음 나온 메뉴는 파스타였다. 납작한 페투치네 면이 매우 먹음직스런 빛깔의 크림소스와 섞여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그 소스의 원천은 프랑스식 ‘브라운 버터’ 크림이라고. 브라운 버터는 헤이즐넛처럼 고소한 향이 나고 음식의 풍미를 더욱 짙게 한다고 한다. 더불어 관자와 송화 버섯, 그리고 트러플 오일이 들어가니 향까지도 먹음직스러웠다. 실제로 셰프님은 “향 먼저 맡아보시겠어요?”라며, 포크부터 드는 우리에게 향을 맡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고소한 버터와 트러플 향이 솔솔 풍겼다.
숙성된 블랙 앵거스 살치살 스테이크
파스타를 해치우고 나자 세트메뉴의 왕, 스테이크가 당도했다. 겉은 익고 속은 적당히 안 익은 선홍빛의 살치살이었다. 함께 플레이트 된 흰 고체 소스는 생 트러플이 들어간 버터라고 했다. 세상에 그리 맛있는 버터가 많은 줄 왜 몰랐던가. 하지만 이 메뉴의 감동은 따로 있었다. 바로 ‘라리고’. 치즈와 감자를 섞어 만든 이 라리고를 셰프님이 직접 접시에 콸콸 부어주신다. 아, 치즈 덕후인 내 입에 느끼함과 고소함으로 들어차던 라리고! 이와 함께 생 트러플 버터를 올려먹는 살치살은 또 얼마나 예술이었는지! 라리고와 고기의 조화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까먹을뻔했지만, 접시를 함께 채우고 있던 허브향의 라따뚜이도 맛있었다.
'치즈라리고'가 폭포수처럼 떨어져내리는 영상 보러가기 (Click)
프랑스식 수제 디저트 에끌레르
마지막은 프랑스식으로 만들었다는 수제 디저트, 에끌레르였다. 시나몬 향이 나는 바삭한 빵을 깨무니 안에는 부드러운 레몬향 크림이 들어있었다. 앞의 음식들에 어깨를 견줄만한 견고하고 촘촘한 맛의 디저트였다.
우리가 앉은 2층의 유리문 밖으로는 경주의 한옥들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있었다. 추적추적 그칠 줄 모르는 비 탓에 테라스 다이닝을 즐길 수는 없었지만, 차분한 공간에서 느릿한 저녁을 먹으며 비 내리는 창밖을 보니, 또 그런대로 운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맑았으면 더 좋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시간.
붐비지 않는 차분한 공간, 느릿하고 여유로운 식사시간, 그리고 빼어난 맛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훌륭했던 타베르나에서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그건 ‘아, 조금 더 먹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는 거. 우리는 소량의 정성스러운 음식보단 배 터지도록 게걸스럽게 먹는 것에 익숙한 부부여서 그럴까, 120%로 채워져야 하는 배가 80%로 겸손하게 채워지니 조금 아쉽긴 했다. 하지만 그게 또 파인 다이닝의 절제미가 아니겠는가. 최상의 맛으로 배부르지 않게 마무리되는 것, 그야말로 먹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거다.
3박 4일. 하루 빼고 모두 비가 내렸던 경주여행.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또 후회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곳, 타베르나에서의 저녁식사였다. 또 모른다. 이곳이 내가 갔던 때와 달리, 점점 붐비고 정신없는 핫플레이스가 되어 내가 느낀 여유는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이 빼어난 맛만큼은 정말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면 다음에 또 이 맛을 보러 경주에 올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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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먹고 여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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