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오류 : 나만 상처 받았다는 착각
상처의 원리인지는 몰라도, 연애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준' 상처보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 크게 주목하고 이를 편집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그렇다. 분명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들에게는 그리 하대를 하다가도, 자신이 반한 남자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홀대하면 그렇게 노여워하는 여자들이 많다. “근데 너도 저번에 걔한테 상처 주지 않았어?”라고 되물으면,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얘기하겠다, 내 얘기이기도 하다.
복잡다단했던 나의 연애사. 크고 작은 사연들 속에서 나는 주로 상처를 받았었노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경우보다는 내가 차인 경우가 많았으니, 파이로 따지자면 상처 받은 적이 많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처 받은 적이 ‘많은’ 것이지 상처를 ‘준 적 없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사귀어보니 내 생각과 달랐던 어떤 오빠에게서 커플 운동화까지 받아 챙겨놓고는 문자로 이별통보를 한 적도 있었고, 연인 사이는 되지 않았지만 썸을 타는 과정에서 여러 남자들에게 불쾌한 거절을 건넨 적도 여러 번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충분히 더 온유한 방식으로 그들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모종의 쾌감을 느끼면서 그들을 거절하곤 했었다. 그들이 받을 상처에 주목하고 싶지 않았다. 해괴망측한 변명을 해보자면 그 당시 연애 트렌드에 걸맞은 ‘잇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바야흐로 내가 한창 이 남자 저 남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던 20대 중반 시절이 바로 ‘밀당’ 세대였던 것이다. 지금이야 밀당이란 말도 몹시 구시대 단어 같지만, 그때 밀당으로 대변되는 연애 개론들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계산하고 또 계산하기, 진심 드러내지 않기, 끊임없이 상대 불안하게 하기 같은 것들이 그 당시 연애의 주축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당시의 여러 잡지와 방송 프로그램들을 보면 연애 좀 한다는 고수들은 죄다 비슷한 논지의 말을 하고 있었기에, 연애를 모르는 사람들이야 ‘감사합니다’하고 그 흐름을 따라 가기 바빴다. 여자는 남자의 사냥 본능을 자극해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쫓고 싶은 여자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무근본 믿음이 여자들의 마음에 싹텄다. 나도 연애 칼럼들을 밑줄까지 쳐가며 읽는 여자 중 하나였다. ‘다 잡은 물고기’가 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기에.
그런 탓에 본의 아니게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나를 사냥할 생각이 없었던 선한 남자들. 나를 하룻밤 대상으로 보기는커녕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심을 꺼내 보이며 내게 다가오던 남자들 말이다. 밀당이란 것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할 일인데, 나는 구태여 계산하지 않아도 정직함으로 다가오던 사람들을 내 연애 연습의 타깃으로 삼곤 했다. 얘랑 사귈 생각은 없는데 한번 안달 나게 해 봐? 이렇게 하면 남자가 평생 나를 나쁜 여자(그땐 나쁜 여자가 제일 멋진 줄 알았다)로 기억한다는데 한번 해볼까? 나를 거쳐가는 찰나의 인연들조차 모두 나를 무심하고 나쁜 여자로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한 번은, 내게 호감을 보이던 한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던 중 연락을 하기가 귀찮아진 적이 있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억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를 거절할 권리는 내게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정중하게 에둘러서 ‘우리는 잘 안 맞는 것 같으니 다른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요’라고 표현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싸가지를 끌어모아 ‘너무 귀찮아서 그런데 우리 이제 연락 좀 안 하면 안 될까요?’라고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놈의 ‘갑’이 한 번 되어보고 싶었던 나의 비뚤어진 욕망. 그 욕망 탓에 아무 죄도 없는 이에게 쌀쌀맞게 군 것이다. 당황해하면서도 서운해하던 그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본성이 나쁜 여자가 못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나쁜 여자를 흉내 내놓고도 썩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좋아하던 남자에게 거절당했을 때의 그 기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라서, 휴대폰 너머에서 속상해하고 있을 상대가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정말 그 밀당인지 뭔지 하는 것에서 이긴 걸까. 누군가의 호의에 콧방귀를 뀔 수 있는 매력적인 여자가 된 걸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유치함일 뿐이었는데.
한 2년이 지났을까. 정신없이 뒤섞여있던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서 우연히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언젠가 내가 귀찮다며 싹수없는 문자를 보내도 정성을 다해 답장을 하던 그 사람. 그의 옆에는 너무도 선해 보이는 신부가 활짝 웃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선한 모습의 신랑 신부를 보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루저였음을. 그에게는 그렇게 나쁜 여자인 척해놓고도 여전히 다른 남자들로 상처 받으며 찌질한 연애를 이어가던 내가 루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를 카카오톡 목록에서 지우며 나는 가닿지 못할 축하의 인사를 마음속으로나마 건넸다.
‘저, 기억이 날 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싸가지예요. 결혼 정말 축하해요. 그때 절 놓치길 정말 잘했어요. 난 나쁜 년이 아니라 바보 같은 년이었으니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주었던 상처들, 어쩌면 내가 줘놓고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자잘한 상처들까지 헤아린다면, 나는 내가 받은 상처가 아프다고 징징댈 형편이 못될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내가 받은 상처를 크게 부풀려 편집하고 왜곡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다 날 힘들게 해, 난 이렇게 착한데!”라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창피해서 꺼내지 않게 됐다. 그때 그렇게 내게 맞지도 않는 연애 트렌드를 무작정 섬기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과거에 내게 상처 받았을 누군가에게 이제는 사과할 기회조차 없는 것을. 부디 나 때문에 너무 큰 상처를 받거나 오랜 기간 마음고생 한 사람들이 없기를 기도해보는 바다.
나처럼 나쁜 여자 코스프레에 물들어, 제 진심도 아니면서 남자들을 불안하게 하고 상처 주는 맛에 살던 여자들은 세상에 얼마나 많았을까. 다 잡은 물고기가 되지 않기 위해 답장 보낼 시간을 계산하고, 일부러 약속시간에 늦고, 보고 싶어 죽겠지만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서 트렌드에 따라 연애해온 여자들은 몇이나 될까. 그렇게 해서 끌어올린 자존감으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멋지고 만족스러운 연애를 해왔을까. 나의 마음속엔 지울 수 없는 헛헛함이 남아있는데, 그녀들도 나와 같을까.
그때로부터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 이상 밀당이 답이 아닌 지 오래다. 대신 새로운 연애 트렌드가 생겼다. 여성이 남성의 연락을 기다리고 사냥감이 되는 연애가 아닌, 자신의 순수한 호감과 욕망을 남녀가 상호 투명하게 드러내며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하는 것이 요즘의 연애 트렌드다.
물론 트렌드는 또 바뀔지 모른다. 다시금 밀당을 하라고 재촉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주도하는 트렌드가 어찌 되건 누군가에게 불안감과 상처를 주는 행태는 더 이상 따르고 싶지 않다. 내 감정을 속이고 거짓을 연기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연애를 해보며 느낀 바가 있다면, 결과가 어떨지언정 정직한 진심을 보여준 때가 더 후회 없고 깔끔하다는 결론이다. 그러니, 모든 경험을 일반화하는 연애지침서보다는 내 마음을 따르는 편이 언제나 우리의 정답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게 아니라 사랑이 본래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길들이려 할수록 오히려 더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중에서
연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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